어느 미국인 부부의 국경을 초월한 황혼 여행기
지은이: 김덕영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저자 /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를 쓰고 나서 나 역시 커다란 인생의 변화를 경험했다. 경복궁 근처에 나만의 작업실을 열었고, 그곳에서 낮에는 커피를 팔고 저녁때는 와인을 즐기려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다큐멘터리 제작과 글쓰기라는 두 가지 창작의 길을 인생의 테마로 정하면서 나에게는 '책과 여행'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두 가지 모두 낯선 곳, 낯선 것에 대한 색다른 문화를 체험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낯선 것에 대한 동경은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 낳는다. 거부감과 호기심이라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편한 것, 익숙한 것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존재들이다.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것이 지루한 일상일 수 있지만 덕분에 우리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한다. 거부감은 이런 안정적인 공간에서 벗어나는 순간 느끼는 일종의 공포심과도 관련이 있다.
반면 호기심 또한 우리가 낯선 공간에서 느끼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다. 색다른 문화를 체험하고 이국적인 음식을 먹으며 생활한다는 것보다 우리 몸 안에 엔돌핀을 돌게 만드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근본적인 이유다. 여행의 어원이 되는 'Travel', 그건 고된 노동이나 힘든 일을 뜻하는 'Travail'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그런 힘든 일을 일부러 한다는 건 우리 안에 안정적인 생활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넓은 세상을 바라보려는 호기심이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들면 꼭 해보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낯선 외국 땅에 정착하는 것’이다. 이건 외국에 아예 이주하는 이민과는 다르다. 국적을 바꾸고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은 어느 면으로 봐서도 노년기의 삶에 바람직한 영향을 줄 수 없다. 일단 비용에 대한 리스크가 크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높을 수밖에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한 3,4개월 혹은 길게는 반 년 정도 '임시적인 이주'를 의미한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에도 그가 글을 쓸 때는 외국에 나가 있던 경우가 많았다. 미국은 물론이고 이탈리아나 그리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도 수개월 동안 장기 체류를 했다. 그의 글에서 풍겨나오는 이국적인 정서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생활공간의 묘사 등은 그의 임시적인 이주 덕분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심리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이런 낯선 곳에서의 정착은 노년기 인생의 활력소가 되기에 충분하다. 무료하고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서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과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신선한 삶의 자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장기 체류 형식의 외국 여행은 한 번쯤 주목해 볼 만 하다. 어느 외신이 소개한 미국인 마틴 부부의 사례는 성공적이고 자유로운 배가본드(방랑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 날 린 마틴은 70세가 되자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집을 팔고 남편과 자신에 필요한 짐만 여행가방에 넣고 여행을 떠났다. 그 후 두세 달 정도의 간격으로 멕시코, 아르헨티나, 터키,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영국을 여행했다. 그들이 이렇게 국제적인 방랑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1,2주의 짧은 여행만으로는 여행의 참다운 재미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었고 그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행복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행객이 아니라 그 나라 현지인처럼 살아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집이 없는 방랑자가 됐다. 여행의 경비는 캘리포니아의 집을 팔아서 마련했다. 노년의 안락함과 자식들 부양에 대한 심리적 압박을 느끼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사실 좀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을 얘기다. 하지만 그들이 얻은 삶의 보람과 비교하면 그 모든 대가들은 충분한 보상을 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과연 그들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낯설고 도전적인 인생을 시작한 그들에게 언젠가 신문사 기자가 물었다. ‘도대체 이런 여행을 왜 하는가?’라고. 그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우아한 캘리포니아 저택을 포기하고 파리나 이스탄불에 있는 작은 아파트 하나를 빌려서 사는 인생은 후회 없는 선택이다. 고급 자동차, 푹신한 소파, 호화로운 주방 대신,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흠집난 조리도구와 달랑 하나뿐인 세면대. 하지만 천국의 맛이라 할 만한 요리를 거의 매일 즐기고, 암소조차 아름답게 보이는 감미로운 프랑스 전원 마을을 드라이브하고, 저녁 운동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이탈리아 피렌체의 아르노강을 산책하는 기분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인생의 즐거움이다.”
그들은 낯선 곳에 정착하기 위해서 우선 집을 판 돈을 믿을 만한 자산관리사에게 맡겼다. 전문적인 투자자들로 구성된 그들은 원금을 투자해서 얻은 수익을 매달 5,6백 만원씩 송금해준다. 이 정도 비용이면 두 부부가 한 달 정도를 살기에 풍족한 비용이다. 게다가 집세와 생활비는 물가가 저렴한 국가일수록 줄어든다. 무엇보다 그들은 집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재산세를 낼 필요가 없다.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각종 공과금과 잡다한 생활비용 등도 줄일 수 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된 시대에서는 어딜 가도 마치 내 집처럼 세상과 연결할 수 있다. 글을 쓰고 송고를 하거나 인터넷으로 주식 관리를 하는 사람들은 전혀 불편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생활의 조건들이다. 마틴 부부 역시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낯선 곳에 정착하기는 그들에게 대단히 큰 만족감을 선사하고 있다. 삶이 즐겁고 재밌다는 것이다. 노년의 무료한 삶과 비교할 때, 이것보다 더 매력적인 말이 또 있을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런 삶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대부분의 노년층이 경험하는 것이지만 노년기에 이를수록 윤택한 생활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은퇴를 하거나 사업을 정리한 경우, 연금과 저축만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들을 압박한다.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으니 당연히 매사에 소극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을 더욱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다. 우리들 모두는 대부분 자기 집 하나 정도는 소유하고 있어야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낀다. 집이 일종의 안전판이다. 게다가 집이 투자의 대상이 되어 재미를 본 경우도 많다. 그러나 고도 성장기에 집값이 천정부지로 뛸 때의 이야기다. 이제 일본처럼 제로금리의 시대가 현실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집을 투자나 자산관리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한 노년의 삶은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다.
이제는 집으로 미래의 삶을 보장받을 수는 없다. 차라리 자신이 행복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일을 찾아서 평생 보람을 느끼는 것이 더 나은 삶이 아닐까. 집에 발목이 잡히지 말고, 집을 디딤돌로 활용할 생각을 해야 한다. 조금은 무모해 보이긴 하지만 마틴 부부의 삶처럼 도전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을 한 번쯤 주목해 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낯선 곳에서의 체류는 정신적인 만족감과 이국적인 체험 등을 주면서 새로운 사업의 아이디어를 얻을 기회를 준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인생의 노년기를 불태울 멋진 일들을 도모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집, 그리고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자동차, 가구, 골동품, 이런 것들보다 더 소중한 것이 우리 인생에 있을 수 있다는 걸 믿는다면, 낯선 곳에 정착할 준비를 시작해보자. 어쩌면 영화 속에서나 봐왔던 흥미진진한 인생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기 자신과 진정 만날 수 있는 시간을 얻고자 한다면 언젠가는 한 번쯤 꼭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나도 그런 여행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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