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중에서
나이가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갈수록 누구나 기억력의 저하를 경험한다. 사람의 이름이나 전화번호가 잘 기억나지 않거나 방금 들었던 이야기조차 까먹는 일들도 있다. 심지어는 판단력이나 집중력에서도 젊은 시절과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뇌도 다른 신체 부위처럼 노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믿는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폐경기가 겹치면서 심한 우울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중년의 위기'라는 말은 이런 근거 위에서 자리를 잡아나갔다.
사실 몇십 년 전만 해도 두뇌에 관한 지식은 제한적이었다. 인간의 다른 세포들이 상처를 입었을 때 재생이 되는 것과 달리 두뇌는 재생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심지어 프로이트 같은 학자조차도 두뇌는 결코 재생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신체의 노화와 함께 두뇌도 노화가 이뤄지고, 결국은 쓸쓸하게 노년을 맞이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은 중년의 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뇌 스캐너와 유전자 분석과 같은 새로운 기술적 성과들 덕분에 중년의 뇌는 새로운 가능성이 계속 증명되고 있다.
우선 치매를 놓고 보자. 두뇌의 노화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치매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때문에 치매는 노인이 되면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오늘 소개하려는 한 수녀의 이야기는 치매에 얽힌 가장 드라마틱한 극적 반전을 보여준다. 그 이야기는 1986년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시작된다.
켄터키 대학교의 뇌신경학자 데이빗 스노든과 그의 동료들은 치매와 노화의 상관관계를 파헤치기 위해 프랑스로 날아갔다. 당시 노화 연구는 주로 양로원에서 나이가 들어 몸을 가누기 쉽지 않은 노인들을 상대로 이뤄져 왔다. 노화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자연적인 과정이었고 인생의 막바지에 이른 양로원 노인들은 두뇌 노화의 연구를 하기에 가장 좋은 표본이었다. 문제는 그런 한정적인 제약 속에서 지금까지 대부분의 노년기 두뇌 연구가 이뤄져 왔다는 점이다. 노화에 대한 편견을 깔고 두뇌의 노화 연구가 이뤄져 왔던 것이다.
스노든 교수는 가톨릭 수녀원에서 생활하는 수녀들을 대상으로 두뇌가 어떻게 노화에 이르게 되는가를 오랜 시간 추적했다. 이 연구에 참가한 수녀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이 사망하면 자신의 뇌를 연구팀에게 기증하기로 약속을 했다. 평생을 헌신과 봉사의 인생으로 일관했던 수녀들은 죽어서도 인류의 의학 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신체를 기증한 것이다.
연구의 대상이 되었던 수녀들 중에는 베르나데트라는 이름의 수녀가 한 사람 있었다. 그녀는 81세부터 84세까지 치른 인지 시험에서 모두 최우수 성적을 거뒀다. 수녀원 연구대상자들 가운데 최고의 엘리트였다. 그녀는 85세 심장마비로 사망을 했다. 그녀가 사망하자 연구팀은 약속대로 그녀의 뇌를 연구하기 위해 분석실로 옮겼다. 스노든 교수의 연구는 노년기에 접어든 두뇌가 노화와 함께 어떤 변화를 겪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연구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베르나데트 수녀의 뇌를 조사하던 연구팀은 뜻하지 않게 새로운 발견을 하나 하게 된다. 그 발견은 이후에 노년기 두뇌 연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온다. 그날 연구진을 놀라게 한 건 베르나데트 수녀가 오래전부터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 있던 치매 환자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뇌에서 표본을 분석한 연구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녀의 뇌에서 알츠하이머 병을 진단하는 가장 중요한 증상 중의 하나인 플라크가 무수하게 엉켜 있음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알츠하이머를 진단하는 척도로 봤을 때, 그녀의 상태는 최악의 수준을 가리키는 마지막 6단계에 해당됐다. 그렇게 심한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데트 수녀는 어떻게 678명의 수녀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지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인간의 두뇌가 갖고 있는 신비한 복원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연구진은 베르나데트 수녀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그것을 ‘인지적 비축’이라는 용어로 정의했다. 두뇌가 마치 힘의 비축분을 보유하고 있다가 특별한 난관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 능력을 꺼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마치 저축을 해뒀던 돈을 형편이 어려울 때 꺼내 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두뇌가 갖고 있는 ‘인지적 비축분’이란 두뇌를 지속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과학자들은 이들의 사례를 통해서 어떻게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뇌 손상에 잘 견디는지, 뇌졸중을 입은 환자들 사이에도 왜 차이가 발생하는지를 밝혀내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결론은 지적인 활동이었다. 지적인 활동을 오랫동안 해 온 사람들에게서는 마치 필요할 때 능력을 차출해 낼 수 있는 강하고 끈질긴 뇌의 연결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런 능력을 통해 알츠하이머와 같은 질병이 생겨도 자동적으로 보호막을 형성해서 비상용 발전기를 돌리듯 뇌의 기능을 복구해내는 것이다.
이런 인지적 비축분에 관한 연구는 최근에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런 인지적 비축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독서나 교육과 같은 지적인 활동이라고 알려져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언어 학습을 하거나, 독서 등을 통해 뇌를 단련시키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인지적 비축분이 강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결국 평소 지적인 활동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치매나 알츠하이머와 같은 질병에 걸릴 가능성도 낮아진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베르나데트 수녀와 같은 사례는 특수한 것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서 유사한 사례들이 속속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한 나이 든 체스 선수 역시 우리 두뇌가 갖고 있는 인지적 비축분의 활용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다. 그 노인 체스 선수 역시 베르나데트 수녀처럼 알츠하이머의 증상이 이미 두뇌에서 심각하게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체스 선수로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전에는 여섯 수를 내다보고 체스를 둔 것에 비해서 죽기 전 에는 네 수 정도밖에 내다보지 못한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인간은 성공을 위해서 비싼 값을 지불하고 교육에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하지만 교육이 단지 성공이나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노년에 이르러서 치매와 같은 질병을 예방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 다른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심리학자인 윌리스 연구팀은 이른바 ‘시애틀 종단연구’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그들은 1956년에 시작해서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6천 명 가량의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관찰했다. 시애틀에 있는 건강 관리 단체에서 무작위로 선택한 실험 대상자들은 모두 건강한 성인들로 20세에서 90세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층과 직업군을 갖고 있었다. 연구팀은 이들을 7년마다 검사해서 그들의 지능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지속적으로 살펴봤다. 그 결과 그들은 두뇌의 기능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가 20대가 아니라 중년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가장 복잡한 인지 기술을 측정하는 검사에서 40대에서 60대에 속하는 중년들이 받은 성적은 20대나 30대가 받은 성적보다 월등히 높았다. 검사에 사용한 범주들은 어휘력, 언어 기억, 공간 감각 테스트, 귀납적 추리 등이었다. 윌리스는 이를 토대로 쓴 <중간의 삶>이란 자신의 저서에서 ‘남녀 모두 (지적) 수행력이 절정에 도달하는 시기는 중년이다’라고 자신 있게 밝히고 있다.
맨날 이름이나 까먹고, 늙어가는 것에 회환이나 하고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중년들이 오히려 뇌의 기능에 있어서는 20 대들보다 월등히 앞선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중년의 뇌가 이처럼 숨겨진 능력과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뇌신경학계의 여러 연구팀들이 갖고 있던 중요한 문제의식이었다. 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은 실험과 연구를 계속해 왔고 결국 그들은 몇 가지 공통점에 도달했다. 그것은 중년의 뇌에만 존재하는 ‘경험’이라는 가치와 관련이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지혜라고 불렀던 바로 그것이다. 삶을 오래 산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경험과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지혜가 바로 비밀을 푸는 열쇠였던 것이다.
또한 중년에 도달한 사람들에게서는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생각이 지배적이다. 중년에 도달할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차분하게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것은 뇌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기능들과도 관련이 있다. 그것은 ‘긍정성의 효과’라고 명명되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부정적인 일보다는 긍정적인 일에 초점을 맞춘다. 나쁜 기억보다는 좋은 기억들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부정적인 입장보다는 긍정적인 자세가 더 드러나게 된다. 결국 우리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세상은 펼쳐진다. 마음먹기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두뇌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도구가 된다. 우리가 마음먹은 것,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두뇌도 우리의 눈 앞에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긍정적인 마음 자세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중년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 두뇌가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우리의 두뇌는 지금까지 한쪽 두뇌만을 사용하던 방식에서 벗어나서 양쪽 두뇌를 동시에 사용하게 된다. 이처럼 두 가지 뇌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은 사물을 편향된 자세에서 바라보지 않고 보다 중립적이고 관조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나이가 들수록 부정적인 것에 쉽게 휩쓸리거나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사태를 지켜보면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나가는 것도 이런 이유다. 그것은 마치 무거운 의자를 한쪽 팔만 사용하지 않고 두 팔로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결국 나이가 들었다고 배움을 포기하거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의 두뇌는 죽을 때까지 배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들수록 두뇌가 퇴화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바라보던 낡은 사고방식은 더 이상 현실에 맞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은 삶 속에서 연륜을 지닌 지혜롭고 경험 많은 연장자들을 지도자로 선택해 왔다. 위험을 피하고 더 안전한 삶을 위해서 많은 경험을 지닌 사람들은 늘 존중받아왔다. 그것은 부족의 안전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이런 중년과 노년의 지혜로운 삶이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기계문명 속에 밀려 잠시 뒷전으로 밀려나갔을 뿐이다. 공교롭게도 그들을 뒷전으로 몰아세웠던 과학과 테크놀러지들를 통해서 노년의 삶은 새롭게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당신을 상처 입힌 손이 바로 당신을 치유하는 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두뇌 과학과 연구는 인간이 오래전부터 존중해왔던 ‘지혜로운 사람’들을 다시 사회의 전면에 복귀시키고 있는 중이다.
- 이 글은 미래에셋 연구소에 연재되었던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를 글을 보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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