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무얼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꿈은 생각 안에 잠자고 있는데...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은 50세가 되었을 때 '나는 이제 50세가 된다'라고 허리띠에 새겨 넣었다고 한다. 일기장이나 작품이 아니라 허리띠에 그런 말을 새겨 넣은 이유가 뭘까? 단서는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에 있다. '나는 이제 50세가 된다'라고 허리띠에 새겨 넣었던 바로 그 순간, 스탕달은 자신이 과거에 사랑했던 여자들의 이름도 동시에 적었다. 물론 허리띠가 아니라 작품 속이었다.
누구나 꼭 그런 건 아니지만, 50이 된다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다. 60이 된다는 게 완전히 올드한 패션으로 옷을 차려입는 걸 의미한다면, 50은 40과 60의 어중간한 사이에 껴서 별로 주목도 못 받는 파티의 외톨이가 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고민과 생각이 많으면 아무래도 인생은 진지해진다. 위대한 작가들의 연보에서 50을 기점으로 인생의 궤적이나 취향이 바뀌는 걸 발견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아무튼 스탕달도 그랬던 것 같다.
완벽한 개인주의가 발흥하기 이전,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스탕달은 개인을 공기처럼 짓누르는 전체주의와 대립각을 이뤘다. 그의 삶 자체가 자유분방했고 개인의 욕망이 출발점이었다. 대표작 <적과 흑>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주인공은 자신의 욕망과 목표를 위해 여성을 이용할 줄 아는 능력자였다. 물론 그런 맹목적인 인생의 종착역은 허무한 파국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 삶을 관통하는 욕망이라는 가치였다.
'어차피 인간은 영원히 무언가를 꿈꾸고 갈망하는 존재다.
욕망, 아쉬움, 미련 같은 감정들이
정해진 시간표대로 플랫폼에 도착하는 인생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뭔가를 꿈꿀 수 있기에 우리의 삶은 쉼 없이 전진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스탕달은 평생 살면서 일정한 주소나 안정적인 직장에 다닌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그에게는 집도 자식도 없었고 애인도 없었다. 숱한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지만 안정적으로 가정을 꾸릴 만큼 믿음직스러운 인생의 파트너는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7세 때 어머니를 잃고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배경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에게 여자라는 존재는 욕망의 대상이자 꿈이었다. 만지고 싶어도 만질 수 없고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어떤 신기루 같은 존재들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신기루들을 향해서 그는 글로 여행을 떠났다. 생각이 곧 운명을 결정지었다.
스탕달의 전기작가로 유명한 앙드레 모로아는 50을 넘기면서 허리띠에 글을 새긴 스탕달의 엽기적인 행태를 이렇게 분석한다.
"50세가 된 작가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지금껏 무엇을 했고 무엇을 표현했단 말인가? 이야기해야 할 때는 바로 지금부터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써야 하는지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일할 수 있는 세월이 앞으로 얼마나 남아 있는가? 이미 심장의 고동은 순조롭지 않고 눈도 밤에는 책을 읽을 수가 없다. 앞으로 10년이 가겠는가, 15년이 가겠는가?"
그래서 스탕달에게도 어느덧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 순간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공교롭게도 그의 대표작인 <적과 흑>은 그의 나이 48세에 쓰였다. 거의 50을 가까이 둔 시점에 완성된 것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그리고 아마 누구나 경험하게 되겠지만 40이 된다는 것과 50이 된다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느낌도 다르고 정서도 다르다. 남의 옷을 입고 거리를 나가는 느낌이 든다. 눈은 더욱 침침하고 아침에 일어나면서 온몸이 뻐근한 게 마치 자기 전 누군가와 싸움이라도 한 판 벌린 느낌이 든다. 막막하고 두렵고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바로 그 50부터 자살을 꿈꾼다. 꿈을 꿀 게 없으니까 그런 것이라도 꾸는 건가. 왁자지껄 떠들고 즐겼던 희극적 인생의 1막이 끝나고 잠시 인터메쪼를 지나 2막을 기다리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물론 2막부터는 비극이 시작될 것 같다. 그런 불길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것이 50이 주는 숙명이다.
스탕달을 통해 그의 전기작가 앙드레 모로아는 결국 50이 주는 운명적 전환을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는 기술이란 무엇인가 희망을 유지하는 기술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기술은 단지 50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삶이 팍팍해지는 건 누구나 똑같다. 세상을 느끼는 온도의 차이가 20이라고 다를까. 어차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같은 것일 테니까. 그렇다면 희망을 유지하는 기술 역시 50의 전유물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어느 순간이든 누구에게든 희망을 유지하는 기술이야말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술이 아닐까.
희망, 도전, 꿈, 이런 단어들이 청춘의 특권이라 여길 수 있는 근거는 없다. 편견이 문제지 희망이나 꿈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결국 생각하기가 인생을 결정한다. 편견이란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한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파티장으로 향하는 그 불편한 심정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남의 시선, 타인의 평가, 그들의 말과 행동에 구속되지 말아야 한다. 진정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먼저 우리의 발목을 붙들고 있는 덫을 걷어치우자. 꿈을 달성하는 것은 그다음 문제다. 우선 먼저 각자 꿈을 꿀 수 있는 잠자리부터 만들어야 한다. 잠을 자야 꿈이라도 꿀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각자의 몫이다. 스탕달에게는 아마 허리띠에 '나 이제 50이 된다'라고 글귀를 써넣을 결단력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마음먹기에 따라 삶은 폭포수처럼 위아래가 확연히 갈라진다.
열정 없이 삶을 마감하는 비참한 인생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먹기 나름이다.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인생을 만든다." 공교롭게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50이 될 때 삶이 갈피를 잡아 나갔다. 로마의 최고 권력자에서 인생에 진지한 물음을 던지는 철학자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탕달에게는 허리띠가 있었다면, 아우렐리우스에게는 '로마의 개'가 있었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인생을 만든다'는 불멸의 명언은 실제로 그가 살면서 뼈저리게 경험했던 처절한 패배의 교훈들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이야기는 그가 로마의 대군을 이끌고 게르만족을 정복하러 갔을 때인 서기 17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침없이 유럽 대륙을 석권하던 로마의 대군이 게르만족과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다. 도나우강 가에서 제대로 진격도 못하고 자신이 아끼던 근위대가 연패를 거듭한 것이다. 보다 못한 황제는 자신이 직접 전장을 지휘하기로 마음먹는다. 최정예 부대, 드높은 사기, 풍부한 병참, 여기에 비밀 병기 하나를 추가한다. 바로 아프리카에서 포획한 사자들이었다. 우리에 가둔 사자들은 며칠 동안 먹이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게르만족과의 전투가 착착 준비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굶주린 사자들이 숲 속에 진을 치고 버티고 있는 게르만족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할 일만 남았을 뿐. 오늘로 치면 탱크 부대를 몰고 전장에 나간 것이다.
드디어 성난 사자들을 묶고 있던 밧줄이 풀렸다. 사자들은 정신없이 먹잇감을 찾아 숲 속으로 질주했다. 황제는 물론이고 로마의 병사들 입가에도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제 곧 벌어질 사자들의 잔혹한 살육의 장면을 떠올리며 귀를 막는 자도 있었다. 그런데 숲 속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는 일이 벌어졌다. 사자의 포효 소리, 게르만족의 절규를 기대하던 사람들에게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도륙당한 건 게르만족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온 사자들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날 게르만족들은 사자라는 동물을 난생처음 봤다. 당연히 동물의 정체를 몰라 다들 어리둥절했다. '이것이 도대체 뭘까?' 모두가 허둥대고 있던 바로 그때, 게르만족의 장군 하나가 나타나 이렇게 외쳤다. “저건 로마의 개다!”
사자를 사자가 아니라 개라고 외친 순간, 병사들의 두려움도 사라졌다. 자신들이 그저 매일같이 봐오던 개일 뿐이라는 말 한마디에 전세는 역전되었다. 게르만 병사들은 사자들에게 달려가 말 그대로 개 패듯이 두들겨서 잡았다. 사자의 성난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도 게르만 병사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저 집에서 키우는 개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우렐리우스의 정예 부대는 또 한 번의 패배를 맛봐야 했다.
그날의 일화는 황제의 인생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는 깨달았다. 우리의 사고방식 하나가 행동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생각 하나가 우리의 운명까지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사자를 개 패듯이 두들겨서 몰살시킨 게르만족들의 모습을 통해서 로마의 황제는 인간의 의식보다 더 강하게 인간의 삶과 운명을 결정짓는 것도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조금은 시시해 보이고 성취한 것이 없다고? 시시한 것은 당신의 생각이지 인생에 무슨 잘못이 있을까. 조금의 좌절도 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훌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먼지 좀 묻었다고 뭐 그리 대수일까. 혹시 지금 당신 곁에 누군가 그렇게 넘어져 있지는 않은가? 무심할 텐가? 어차피 손을 뻗어 잡아줄 넉넉한 마음을 지닌 존재들인데.
어쩌면 눈부시게 화려한 두 번째 인생을 기다리며 첫 번째 인생을 숨죽여 참고 기다려 온 것은 아니었을까. 누구에게나 새로운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는 살아갈 남은 시간이 아직도 많다는 것이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 현재 8번째 신간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 2>를 집필 중에 있습니다. 이번 책은 스토리 펀딩으로 제작되어 출간될 예정입니다. 글이 마음에 드신 분들은 신간 출간에 힘을 보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원을 해주시는 분들에게는 저자 사인이 담긴 신간을 배송해드립니다.
스토리 펀딩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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