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달랐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시간 관념
몇 년 전 나는 배낭 하나 달랑 메고 30일 동안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고대 그리스의 유적지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시작해서 터키 서부 해안 도시들을 하나하나 훑은 뒤에는 배를 타고 그리스의 에게 해의 섬들을 거쳐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들을 탐험하는 여정이었다.
그 흔한 관광지들을 마다하고 오로지 고대 그리스의 돌덩이들만 둘러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예술과 문화, 철학과 사상이 동시에 꽃피었던 고대 그리스의 땅들. 그곳에는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의 유적지들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일종의 성지순례라고나 할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두 발로 문명의 요람을 뛰어다니고 싶었고, 열 개의 손가락으로 문명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아주 우연히 그 과정에서 '시간'에 관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색다른 해석을 발견했다.
'시간'에 대한 해석만큼이나 철학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이슈가 또 있을까. 임마뉴엘 칸트 같은 철학자에겐 모든 존재하는 사물이 시간과 공간의 규정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경험의 영역이건 초월의 영역이건 시간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 속에서 우리는 자유를 느낀다.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 그에 비하면 한 번 흘러가버린 시간은 이동이 불가능하다. 아쉽고 안타깝고 애절한 느낌이 시간 속에 묻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공간을 통해 자애로운 어머님의 품에 안긴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낀다면, 시간은 아무래도 무뚝뚝하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집을 떠난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래서 때로는 더 간절하게 보고 싶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인간은 유한성을 경험한다. 시간을 생각하면 아주 묘한 감정에 빠져든다. 그래도 어차피 죽을 인간이면서도 영원(永遠)을 꿈꿀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가. 집 떠난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영원의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한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다. 인간이 영원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래서 또 어떤 고대 문명은 시간을 수레바퀴와 같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돌고 돌아 다시 처음 출발했던 지점으로 되돌아오는 시간의 숙명. 반면에 기독교나 이슬람에서 시간은 단선적이다. 출발이 있고 끝이 있다. 모든 것을 주재하는 것은 전지전능한 신이 된다. 그렇게 시간에 대한 해석이 결국 인간의 삶을 바꾼다.
때문에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간에 대한 해석이 곧 그 사람의 철학이 되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체가 분명한 시간 덕분에 인간은 현상을 뛰어넘는 근본적인 존재, 본질의 인식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시간에 대한 관념 덕분에 그렇게 인간은 누구나 철학자가 될 수 있다.
"도대체 시간과 공간이 실재한다면,
왜 공간은 이동이 가능한데
시간은 이동이 불가능한 것일까?
시간과 공간이 실체라면,
어떻게 형태를 지닌 존재가
무한할 수 있는 것인가?"
시간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 무엇이든 철학적이 될 수밖에 없다. 시간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죽음을 상기시킨다. 시간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없다. 그렇게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아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과거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유한한 존재에 대한 자각이다.
때로는 시간을 잊으려고도 한다. 현재가 고통스러운 사람에게는 살아가는 순간 자체가 고역이다. 그 시간의 끈을 끊어버리는 방법으로 비극을 극복하려 하지만, 그의 행위 자체가 비극이다.
때로는 미래가 달콤한 보상이 되기도 한다. 현재가 고통스러워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시간은 치유가 된다. 상처에서 새살이 돋듯이 그렇게 시간은 현재의 고통을 덜어주고 위로를 준다.
그렇게 누구나 시간과의 싸움을 한다. 행복을 찾든, 고통을 피하든, 시간과의 싸움 앞에서의 존재,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우리와 다른 시간의 개념이 존재했다. 어쩌면 그런 독특한 시간에 대한 해석 덕분에 고대 그리스 문명이 자신들의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독창적인 시간에 대한 개념 덕분에 지혜와 용기로 무장한 전사와 철학자들의 도시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애초부터 시공간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정의는 남달랐다. 시간을 구성하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우선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에 대한 인상을 정리해 보자. 과거를 떠올릴 때, 우리는 보통 등 뒤로 멀리 사라져 가는 어떤 것으로 과거를 생각한다.
시간을 경험하는 주체인 내가 서 있는 자리를 통과해서 시간은 내가 걸어왔던 과거의 공간 속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미래는 정확히 그 반대다. 미래는 우리가 서 있는 지금 현재의 위치 앞으로, 그러니까 저 멀리 어떤 곳에서 우리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인상은 우리와 정반대다.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다. 그들에게 과거란 ‘우리의 눈 앞에서 멀어져 가는 어떤 것’이었다. 반면에 미래는 ‘등 뒤쪽에서 다가오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이 우리는 정반대였다.
잠시 눈을 감고 그들의 생각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지금 당신의 눈 앞에는 작별의 아쉬움을 나누는 두 사람의 연인이 있다.
플랫폼으로 기차가 도착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태우고 갈 기차다. 곧이어 서서히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태운 기차는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철길 저편으로 점점 멀어져 간다.
사랑하는 연인을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기차를 바라보는 듯한 심정, 그런 심정으로 그들은 과거를 바라보려고 했다. 그들에게 과거란 등 뒤로 사라져 버리는 어떤 것이 아니다. 잊히는 것이 아니다. 눈 앞에서 멀어져 가는 것이다.
미래를 생각할 때도 생각의 방식은 우리와 정반대다. 우리가 미래를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등 뒤에서 다가오는 존재로 생각했다. 등 뒤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뿐 아니라, 아예 미래가 언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미래는 어차피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합리적이었다.
이렇게 시공간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개념을 현실의 삶에 적용시켜 보면 의외로 재미난 부분이 많다. 우선 과거를 살펴보자. 사실 과거는 이미 우리가 체험한 순간이기에 우리가 모를 리 없다. 애써 잊고 싶어도 쉽게 잊히지 않는 것들이 과거에 우리가 경험한 것들이다. 좋았던 것은 오래 간직하고 싶지만, 살다 보면 좋았던 기억들보다는 안 좋았던 기억과 경험들이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두뇌라는 것은 참 묘해서 과거를 잊고 싶어서 잊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것이 기억의 패러독스다. 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자체가 이미 기억을 자극하는 일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시달리는 우울증이나 불면증은 대부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아픈 것을 기억하면 기억할수록 기억은 더욱 또렷해지고 잠을 못 이루고 괴로워하면서 점점 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다면 비극적인 삶에 의연하게 적응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무엇이 달랐을까?
그들에게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과거란 늘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기억의 파노라마다. 멀리 있는 것은 그만큼 잘 안 보이고, 가까이 있는 것은 그만큼 더 잘 보이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시간에 대한 개념, 시간을 인식하는 사고방식의 차이 하나로 많은 것이 변하게 된다.
그렇게 과거를 규정했을 때, 과거는 더 이상 회피하고 싶은 대상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결말로 기억된 것일지라도, 그들에게는 영원히 눈 앞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과거와 마주했다. 자신들이 원한다면 언제나 과거로 눈을 돌려 기억의 서랍 속에서 꺼낼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그 과거의 기억을 벗 삼아 오늘을 사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미래에 대한 생각도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시간은 미래를 거쳐 과거로 흘러가는 강물이다. 언젠가는 우리 앞에 다가와 흘러가버리는 것이 시간이었다. 이럴 때의 미래는 그저 기다림의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미래는 정확히 등 뒤에서 밀려온다. 알 수도 없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는 환상도 갖지 않는다. 어차피 미래는 전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신화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영역이다. 신화의 영웅들처럼 운명과 마주하겠다는 각오로 투철할 수 있다면 운명의 파도에 휩쓸릴 염려도 없다. 자신을 믿는다면 미래는 언제나 든든하게 나를 밀어주는 어떤 거대한 힘이다. 그들에게 미래는 등 뒤에서 자신의 삶을 힘차게 밀어주는 원동력과 같은 것이었다.
역설적이지만 신탁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 역시 미래에 대한 이런 사고 방식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그들은 미래를 등 뒤에서 자신들의 인생을 밀어주는 어떤 힘으로 믿고 의지했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녔던 삶의 지혜였다. 어쩌면 그런 독특한 인생관이 있었기에 그들은 죽음이나 비극적인 운명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것이 전쟁터로 나가는 아들을 향해서 어머니가 전하고 싶었던 당당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비록 죽음으로 생이별을 하더라도 늘 과거의 기억 속에 간직할 것이라는 어머니의 단호함의 비결이 바로 시간에 대한 개념 때문이 아니었을까.
(전장에 나가는 아들을 위해 쓴 고대 그리스의 어느 어머니의 편지)
과연 오늘날 우리 중 어느 누가 이런 말을 아들에게 당당하게 외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 전사들에게 방패는 곧 옆에서 같이 싸우는 동료였다. 고대 그리스가 막강 페르시아 대부대에 맞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원동력은 전사들의 방패를 엇갈려 포갠 전투 대형(팔랑크스)에서 비롯됐다.
이런 대형에서 나의 목숨을 지켜주는 방패는 나의 방패가 아니라 바로 내 옆에 있는 동료의 방패가 된다. 방패 하나에도 철학이 있었고 그런 힘으로 고대 그리스는 찬란히 문명을 지킬 수 있었다.
"과연 오늘 우리 손에도
고대 그리스 전사의 방패가 쥐어져 있을까.
전쟁터에 나가는 아들을 향해
'방패 위에 실려 오라'
당당히 외칠 각오가 있을까"
하나의 개념이 주는 의미는 이렇게 남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사회 공동체에 개념이 주는 울림과 역할은 막대하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먼지만 풀풀 날리는 고대 그리스의 돌무더기 사이로 여행을 떠났던 이유였던 것 같다.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정신의 위대한 본보기를 찾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개념을 찾는 여행의 목적이었다.
개념 있는 나라가 세상을 지배한다. 개념을 창조한 민족에게 미래가 있다. 그런 믿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개념을 만들었을까. 무엇이든지 녹여버릴 듯한 기세로 불타오르는 거대한 용광로처럼 지금 우리는 어떤 개념들을 만들고 있는 중인가.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 현재 8번째 신간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 2>를 집필 중에 있습니다. 이번 책은 스토리 펀딩으로 제작되어 출간될 예정입니다. 글이 마음에 드신 분들은 신간 출간에 힘을 보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원을 해주시는 분들에게는 저자 사인이 담긴 신간을 배송해드립니다.
스토리 펀딩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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