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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May 31. 2018

자신감, 자존심, 그리고 자존감

자신에 대한 '생각' 하나가 인생을 바꾼다

일상 언어에서 삶의 절반이 승부가 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는 우리의 무의식과 의식의 세계들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예전에는 물질과 의식의 세계는 분리되어 있으며, 적용되는 법칙 역시 다르다고 믿었다. 심지어 의식이나 관념의 영역은 물질이나 환경의 강력한 지배를 받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최근의 현대 과학은 기존의 물질과 의식에 대한 입장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의식 역시 물질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이 시공간을 초월해서 신체나 물질의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믿기 어려운 실험까지 공개되고 있다. 


이 같은 실험은 인간의 혈액에서 추출한 백혈구의 DNA를 모니터링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실험자의 기분이나 감정상태에 따라 그의 몸에서 추출된 DNA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실험대상자와 백혈구 DNA를 동시에 모니터링해, 기분이 최고치 또는 최저치일 때 다른 방에 있는 백혈구 DNA가 반응하는지 살폈다. 결과는 놀라웠다. 실험대상자의 전기적 응답 측정 데이터와 DNA의 데이터가 정확히 일치했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실험 대상자와 DNA의 거리가 결과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80km의 떨어진 곳에서도 실험대상자와 DNA는 서로 연관성 있는 패턴을 나타냈다. 이것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인간의 감정이나 의식의 상태가 DNA의 변화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백혈구의 DNA가 인간의 기분이나 감정상태에 따라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실험 (NTD News, 2018년 5월 21일 자 보도)


물론 그와 같은 실험들은 아직까지는 저명한 과학 잡지나 학계에 입증된 내용은 아니다. 의식이나 감정이 공간을 초월해서 DNA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말 그대로 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발달된 두뇌 스캔 테크놀로지들의 발달로 인해서 인지 과학의 영역은 놀라운 속도로 넓어지고 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의식의 가능성들이 발견되고 있는 실정이다.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생각을 입을 통해 발설하는 순간,
언어 역시 물질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과 마음의 중심을 어떻게 잡아야 할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자기 자신, 바로 '나'에 대한 이해이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생각의 중심에 놓을 것인가에 따라서 나의 인생이 뒤바뀔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자신에 대한 입장을 세 가지의 개념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자존심, 자신감, 그리고 자존감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에 대해서 어떤 믿음과 생각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많은 것들이 변화할 수 있다.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릴 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자존심이 센 사람이다.' 

'나는 자신감이 부족하다.'

'나의 자존감을 높여라!'


나 자신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이와 같은 일상의 언어들을 사용한다.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개념들이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나에 관한 개념들 중에서 우리가 발전시켜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나의 중심을 어디에 세우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나' 자신에 관한 개념은 무엇일까? 


얼마 전 나는 우리말 사전에서 이 세 가지 개념들이 어떻게 서로 다르게 설명되고 있는지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자존감'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말 사전에는 '자존감'에 대한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자신감'이나 '자존심'은 있어도 '자존감'에 대한 정의는 아예 없는 것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자존심이나 자신감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우리말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말이다.



우리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자존감'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왜 우리말 사전에는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없는 것일까?' 이것은 나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발견이었다. 언어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반대로 삶 또한 언어를 생산해낸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우리의 생활과 머릿속에는 '자존심'이나 '자신감'과 구별되는 '자존감'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자존감을 키울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이 사실을 그냥 우연이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냥 대충 넘어가자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영어에서는 'ego', 'confidence' 같은 단어들이 자존심이나 자신감을 가리키는 단어들이다. 그렇다면 자존감은 어떨까? 영어에서도 우리처럼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없을까? 사전에서 자존감을 검색했다. 무려 서너 가지나 되는 단어들이 검색되어 나왔다. 'self-esteem''self-regard', 'sense of worth', 'pride'.


결국 이런 차이는 우리가 일상의 언어에서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빈도가 매우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존심(ego)이라는 단어가 이기적인(selfish)이란 단어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자신감(confidence)이 증명할 대상에 대한 확증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비해서, '자존감'이란 단어는 보다 고차원적인 상위 레벨에 속하는 것이다. 서구 문학이나 영화를 통해서도 '자존감'이란 단어는 중요한 자기 인식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일상 언어가 사람들의 생각과
의지의 표상이라는 전제를 감안한다면,
결국 우리에겐 '자존감'을 드러낼
틀과 방향이 없다는 의미도 된다.


백과사전적인 정의로 '자신감(自信感)'은 자신이 있다는 느낌이다. '자신', '존재한다', 그리고 '느낌', 이렇게 세 가지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자존심(自尊心)'은 어떨까? 구조적으로는 분명 '자신'에게서 시작하고 있지만, 의미상으로는 '타인'을 대상으로 '자신'의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을 뜻한다. '자신감이란 단어에 비하면 '자존심'은 훨씬 타자 지향적이다. 마지막 끝에 붙어 있는 '느낌'과 '마음'의 차이만큼이나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메커니즘 역시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존감이라는 단어와 익숙하지 않은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시 '자신감'과 '자존심'의 개념 분석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감이란 단어 안에 있는 '느낌(感)'과 자존심의 '마음(心)'이란 단어가 주는 차별성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자존심이란 단어의 구조로 들어가 보자. 자존심이란 단어에는 의지와 행동의 원인으로서 '마음'이 존재한다. 


'마음'은 어딘가로 흘러가는 느낌이나 정서를 가리킨다. 그런 마음이 나 자신으로 흘러들어가지 않고 나 밖의 타자로 흘러갈 때 '마음'은 제대로 자기중심을 잡기 어려워진다. 한마디로 '마음'이 타자를 끝없이 지향할 때 우리의 마음은 제대로 정립될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타인과 비교하려는 생각타인에 맞춰 나를 정의하려는 욕망 등이 그렇다. 어차피 경쟁 사회니까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밖의 외부로 마음을 흘려보내는 정도는 좀 지나칠 정도로 많다.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타인을 의식하면서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르다. 타인을 중심으로 나를 정리하려는 습관은 어릴 적부터 길러지는데, 여기엔 우리의 대학 입시 체계가 결정적인 작용을 하지 않았나 싶다. 타인과 비교해서 나를 정의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는 인생 첫 관문이니 말이다.


'나' 자신이 아니라 '타자'를 중심으로 길러진 사고방식들이 지배하는 사회. 지금 그것이 대한민국의 모든 갈등의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양적으로는 성장했으나 질적으로는 별로 나아진 것이 없는 전근대적 현대성.


하지만 그래도 '자신감'이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타인을 의식하건 안 하건, 적어도 '자신감'만 있으면 그래도 사막에서도 난로를 팔고, 북극에서도 냉장고를 팔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서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신화는 지금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가장 우리의 발전을 담보했던 자신감, 때로 그 근거도 없는 자신감들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결정지을지 고민이 깊어가는 시대, 관건은 자존감의 회복이 아닐까?


자존감의 회복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잃어버린 발전의 동력을 되찾는 최선의 방법이다.


자신감은 '느낌(感)'에 기초한다. 자기가 존재한다는 '느낌'이다. 자신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일종의 자기 확신이다. '마음'이 타자를 지향한다면, '느낌'은 즉자적으로 자아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매개가 없다. 인식의 매개나 대상이 불필요하다. 순수하게 자아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느낌이다. 


그런 느낌이야말로 모든 행동과 의지를 활기차게 만든다. 적극성을 북돋운다. 그런데 아무리 강력한 에너지가 있다고 해도 주체가 상실되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아무리 찾으려 해도 존재하는 자신을 찾을 수 없는데 어디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은 허무와 자기 불신, 불만족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다시 자존심의 불꽃을 태운다. 부채질한다. 자신감의 부족이 자존심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남는 것은 자존감이다. 우리는 자존감이라는 단어조차 국어사전에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자존감이 낮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다. 개념이 곧 인식을 형성하고, 개념의 탄생은 곧 그 사회가 얼마나 열심히 창의적 활동을 벌였는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남의 개념을 빌려 쓰는 공동체에게는 정신의 종속만이 남는다. 새로운 개념을 하나 만들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그만큼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 흘려야 할 땀방울이 있다.


전 세계에 통용되는 우리의 개념 중에는 '빨리빨리'가 있다. 일의 과정보다 성과, 결과, 목표만을 향해서 정신없이 달려가는 맹목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의 '빨리빨리'가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빨리빨리'를 만들었던 앞선 세대들의 땀과 눈물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더 큰 공동체의 발전을 꿈꿨다. 비록 그것이 자식을 더 좋은 대학에 보내고 더 좋은 것을 먹이고 싶다는 일차적 본능에서 출발했다고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역사에서 그들의 희생과 노력이 담긴 '빨리빨리' 덕분에 지금 우리의 번영이 있다.


가난하고 헐벗었지만 자존심 하나로 버텼던 '빨리빨리'였다. 그렇게 자신감이 '빨리빨리' 만들어졌다. 이제 남은 과제는 '빨리빨리'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길이다. 자존감을 높이는 길이다. 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눈을 돌리고 오직 나만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자. 빨리빨리!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인식이 대상에 맞추어져 형성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제 아래서 - 우리의 지식을 확장시켜 주리라고 생각한 - 개념들을 통해 선천적으로 대상에 관해 무엇인가 인식하고자 한 모든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번쯤, 대상이 우리의 인식에 맞추어져 형성될 수밖에 없다고 상정함으로써 반대의 것을 시도해 볼만하다." (임마뉴엘 칸트가 1781년에 쓴 <순수이성비판> 중에서)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김덕영 지음, 다큐스토리 미디어, 2013년


* 현재 8번째 신간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 2>를 집필 중에 있습니다. 이번 책은 스토리 펀딩으로 제작되어 출간될 예정입니다. 글이 마음에 드신 분들은 신간 출간에 힘을 보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원을 해주시는 분들에게는 저자 사인이 담긴 신간을 배송해드립니다. 


스토리 펀딩 링크

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9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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