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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Jun 05. 2023

1912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
등장한 태극기

나라 잃은 조선의 국기가 1912년 미국 민주당 전당 대회 걸린 사연

* 무단 전재 금지, 저자 공지 후 전재 요망


'191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등장한 태극기‘



1912년 11월 15일, 미국에선 28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한 윌슨 대통령이 바로 그해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해 여름, 6월 25일 개최된 민주당 전당 대회를 알리는 홍보물에 태극기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연히 영화 '건국전쟁'에 관한 자료를 리서치하다 발견한 사진인데, 정확히 출처가 어딘지는 확인이 안 되고 있다. 솔직히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사실 여부에 대해서도 정확한 확인이 필요한 상황이다. (혹시 이 홍보물에 대해서 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분이 있다면 연락을 기다린다.)


어쨌든 나라를 잃어버린 조선의 태극기가 새겨진 한 장의 사진을 놓고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구성될 수 있을 것 같다. 몇 가지 파편적인 사실을 재구성한 스토리라는 점은 미리 밝혀둔다. 


1912년, 그해 미국 대선은 여러 가지 점에서 흥미로웠다. 전임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시어도어 루즈벨트 전 전임 대통령이 충돌, 공화당은 둘로 쪼개져서 선거를 치뤘다. 결국 선거는 전체 유권자의 42% 득표율을 얻은 우드로 윌슨의 신승, 만약 태프트와 루즈벨트가 분열되지 않았다면 공화당이 승리했을 선거였다. 


뉴저지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과 나라 잃은 조선의 유학생으로 처음 인연을 나눴던 이승만과 윌슨이었다. 어느 날 뉴저지 주지사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 한창 선거 준비에 바쁜 우드로 윌슨을 이승만이 찾았다. 권력의 중심에 서고 있으니, 제발 힘 없는 자신의 나라 조선의 해방을 위해 힘써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였다. 이승만에게는 민주당의 대선 후보 우드로 윌슨의 한 마디를 얻어내는 것이 절실했을 것이다. 이미 1910년부터 스승과 제자로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사인 한 장이 가져올 정치적 파급효과는 물론이다. 


하지만 윌슨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냉정했다. 개인적 친분 관계와 대통령 후보자 자격으로서 위치는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성명서에 사인을 해달라며 조르는 이승만에게 윌슨은 이렇게 정중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당신의 뜻에 동의하오. 그러나 미국의 정치를 위해 서명할 수 없소. 하지만 모든 약소국들을 위해 할 일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오.” 


완곡하고 정중한 거절이었다. 이승만이 윌슨의 그런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나 서운했을까, 성명서에 사인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이승만의 쓸쓸한 뒷모습을 상상하면 괜히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훗날 대통령이 된 뒤, 우리가 잘 아는 '민족자결주의'를 윌슨 대통령이 세상에 공표하자, 이승만은 그날 자신에게 말했던 '약소국을 위해 일할 것'이란 윌슨의 말이 공허한 대답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날 비록 성명서에 사인은 안 했지만, 윌슨은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의 유학생 이승만을 위해서 강연회 추천장을 써주면서 그의 인생에서 잊지 못할 명언을 하나 남긴다. 


“나 한 사람의 서명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미국인들의 마음의 서명을 받도록 하시오.” 


그날 윌슨의 충고는 청년 이승만의 가슴을 울렸다. 정치란 결국 대중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군사가 무력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이라면, 정치는 총, 칼이 아니라 말과 논리로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이라는 엄연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훗날 미국인들의 양심과 언론에 호소하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이 출발하는 시작점이기도 했다. 정치적 이슈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중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이승만 특유의 정치 스타일이 형성된 시점도 이때가 아닐까 싶다. 


미군정과의 숱한 대립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미국으로 날아가 언론을 통해 자신의 뜻을 알리고 미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노력했던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그는 휴전협정 당시에도 조금이라도 대한민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협정이 진행될 수 있도록 온갖 지혜를 짜냈다.


한미상호방위협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결정적 사건인 '반공포로 석방'은 그런 고민 속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뉴스거리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했던 수많은 정치적 결정들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다시 1912년 민주당 전당대회와 태극기로 돌아가 보자. 어쩌면 그해 전당대회에 등장한 태극기는 우드로 윌슨의 미안한 감정이 담긴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지 않고서야 주권을 빼앗은 일본의 국기와 주권을 상실한 조선의 국기인 태극기를 버젓이 같이 싣지는 않았을 것 같다. 


글쎄... 사실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지나친 상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1912년 미국 민주당에 등장한 태극기를 통해 우드로 윌슨과 이승만, 이 두 사람의 돈독한 관계를 상상해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힘 없고 가난한 나라를 위해 사인 하나 해주는 게 뭐 그리 어려웠을까?' 어쩌면 그날 윌슨에게 거절을 당하며 돌아오는 길에 이승만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을지 모른다. 힘 없는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순간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건 윌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자신을 세계 역사에 알린 '민족자결주의'와 그 덕분에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쩌면 그 옛날 자신에게 찾아와 조선의 독립을 위한 성명서를 내밀었던 이승만의 영향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란 짐작이 간다. 윌슨의 인생에서 이승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이자 큰 자극이었다. 


사족이지만 1904년 이승만 대통령이 한성감옥에서 나와 특명을 받고 미국으로 가서 만났던 당시 미국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즈벨트였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 가서 가쓰라 총리와 밀약을 통해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점유권을 각자 나눠 가졌던 '가스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은 윌리엄 태프트. 1912년 미국 대선에서 우드로 윌슨이 대결했던 루즈벨트와 태프트가 바로 그들이다. 


겉과 속이 달랐던 두 명의 미국 정치인들에게 물 먹었던 이승만을 대신해서 스승인 우드로 윌슨이 한 방 제대로 먹인 것이 1912년 미국 대선이었던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란 참... 


현재 미국에선 조지 워싱턴과 우드로 윌슨의 성상 지우기가 한창이다. 건국 대통령 워싱턴과 약소국을 위한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 우드로 윌슨이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게 비판의 핵심이다. 워싱턴 동상 철거, 프린스턴 대학교에 붙어 있는 윌슨의 이름을 지우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과연 1910년대 인종차별을 논한다는 게 맞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한국이나 미국이 비슷한 역사 논쟁에 휩싸여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장면이다. 어쩌면 세상은 지금 선과 악의 싸움 속으로 휘말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건국전쟁>에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만나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후원: 국민은행 878301-01-253931 김덕영(다큐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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