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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Jan 13. 2017

라라 랜드에서 하루키의 친절심까지

고급스러운 문화적 자극 때문에 그날은 하루 종일 즐겁고 부러웠다

'김PD의 인문학 여행' (35)


다들 한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을 때, '아니야! 난 그렇게 몰려다니지 않을래!'라고 외치면서 혼자서 외길로 가는 것은 사실 말처럼 쉽지는 않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교차점에서 왼쪽이나 오른쪽, 위 혹은 아래를 선택받는 게 사실이다. 그럴 때 사람들이 몰려가는 곳으로 누구나 가고 싶어 진다. 그래야 왠지 모르게 더 안전할 거 같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편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돈도 명예도 그리로 가야 더 쉽게 얻어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의 경우 인생은 늘 '몰려다니지 말라'가 답이다. 영화 <라라 랜드>에서 난 그것이야말로 건강한 개인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영화 <라라 랜드>에 대한 평가가 좋다. 관객과 평론가 모두에게 이렇게 좋은 평을 얻은 영화가 최근에 그리 많지 않았다. 개봉 한 지도 이미 꽤 된 영화인데, 난 이 영화를 그제야 봤다. 덕분에 텅 빈 영화관에서 거의 홀로 남들 눈치 보지 않고 거의 춤추면서 영화를 봤다. 실제로 주인공들의 탭댄스를 따라서 박자를 맞춰가면서 바닥을 두들겨도 누구 하나 싫다고 눈치 주는 사람도 없었다. 가끔은 이렇게 좀 늦게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뭐가 됐든 '몰려다니는 것'에서 벗어나면 이렇게 좋은 점이 하나둘 생긴다.


아무튼 이 영화 너무 좋다. 좋았다가 아니라 좋고 있다. 이런 과감한 표현을 쓰게 된 것은 영화가 진짜 너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짜증 나는 일들, 불안한 미래, 누구나 겪는 하루하루의 일과 속에서 이 영화는 마법처럼 고통을 덜어주었다. 물론 현실로 돌아오면 누구나 다시 불안하고 힘든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마법에 한두 시간 취한다고 뭐 인생 달라지는 게 있을까.

이 영화는 솔직히 말해서 '아! 세상은 어쩔 수 없이 몇몇 천재들이 만들어가는 거구나...' 하고 부정할 수 없는 것들을 고백하게 만든다. 하버드 대학에서 시각 환경학과를 졸업한 감독 데미언 셔젤에게는 대학 동기인 저스틴 허위츠라는 친구가 없었으면 아마 그리 인생이 쉽게 풀리진 않았을 것 같다. 음악에 미친 두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밴드를 만들고 같이 한 방을 쓰면서 영화와 음악을 함께 할 친구로 살아가도록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버드의 기숙사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웠다. 데미언 셔젤 감독의 출세작인 <위플래시>(2014)보다 5년 전에 발표되었던 <Guy and Madeline on the Park Bench> (2009)를 봐도 둘 사이의 교감이 보통은 아니었던 게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하버드의 기숙사 골방(?)에서 둘은 그런 올드한 것들의 매력에 빠져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재밌는 건 당시 옆방의 하버드의 동창들이 온갖 '디지털'의 세계로 몰려갈 때, 그들은 낡고 오래된 흑백 영화를 보며 자신들만의 개성을 만들어갔다. 굳이 표현하자면 '아날로그'의 마법을 느낀 건지도...


실제로 <뉴욕 타임스>에서 데미언 셔젤 감독은 자신들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다큐멘터리 영화 두 편을 소개하고 있다. 1921년에 제작된 맨해튼의 일상을 담담하게 촬영한 단편 다큐멘터리 <manhatta>와 다큐멘터리 영화사에서 걸작 중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지가 베르토프의 <Man with movie camera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년)가 바로 그 작품들이다. 거대하게 성장하는 메트로폴리스의 질주, 격동기의 사람들, 그리고 묵묵히 그런 도시의 일상을 기록하는 카메라를 든 사람들, 1920년대 리얼리즘과 21세의 판타지를 이렇게 동화처럼 조화시킨 것이다. 낡고 오래된 것에서 재미를 본 것이 아닐 수 없다. 영화에선 은근 슬쩍 이런 오마쥬들이 등장하고 있다.


감독의 이런 시선은 뉴욕에 비해서 도시의 매력이라는 측면에서 조금은 저평가받아왔던 LA라는 도시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다. 라이트 하우 까페, 리알토 극장, 그리피스 천문대가 그렇다. 그중에서도 지금은 폐쇄되어 다니지도 않는 'Angels Flight'라는 케이블카를 복원시킨 것만 봐도 그렇다. 비록 꿈과 현실은 다른 것이라 믿지만, 그걸 하고 인정하기 싫은 두 남녀. 그들이 결국 사랑에 빠져 마치 천국이라도 함께 오를 것처럼 끝없이 올라가는 그 케이블카 안에서 마주 보며 키스를 나눈다. 곧 닥쳐올 쓰라린 현실의 어려움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그 케이블카 장면이 바로 폐쇄된 'Angels Flight' 안에서 촬영되었다. 제작진이 고전적인 리듬과 감각을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쩌면 영화 덕분에 다시 그 케이블카가 운행을 시작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오늘 얘기는 <라라 랜드>로 시작해서 하루키의 '친절심'으로 끝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라라 랜드>는 이쯤 해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래도 아직 내 귓전엔 경쾌하면서도 올드한 매력이 느껴지는 <라라 랜드>의 주제 음악들이 감돌고 있다. 당분은 그렇게 지내고 싶다. 일부러 현실감각을 좀 잊기 위해서라도...


<라라 랜드>를 보러 극장에 가기 전에 우연히 읽고 있던 책이 하나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란 책이었다. 한 서너 시간 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고 있었는데, 책을 읽다 한 인물과 우연히 마주쳤다. 아를랑 윌리엄스라는 인물이다. 어쩌면 도서관에서 우연히 책을 찾다 하루키의 책에 시선이 가지 않았다면, 그렇게 책을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아마 분명 모르고 지나쳤을 인물이었다. 난 그날 두 가지 아주 고급스러운 문화적 자극을 받았다. 하나는 이미 언급한 <라라 랜드>의 낡고 오래된 가치들에 빠져있던 두 젊은이들의 포기하지 않은 열정이었고, 또 다른 하는 하루키의 책에서 발견한 아를랑 윌리암스라는 마흔여섯 살 그리 길지 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한 남자의 삶이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럴까, 하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겠다.


1982년 1월 13일, 미국 워싱턴 국제공항을 이륙한 '에어 플로리다 플라이트 90' 여객기가 이륙 직후 고도를 잃고 포토맥 강에 추락한다. 사고 당일 워싱톤에 몰아친 극심한 한파로 인해 포토맥 강은 이미 얼음이 붙어있을 정도였다. 추락 직후 78명이 사망했다. 다행히 6명의 생존자들이 파괴된 비행기 잔해더미를 뚫고 구조의 손길을 요청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워싱턴 공원 관리국 소속의 헬기 한 대가 급파, 구조 작업에 나선다. 생존자들 중에는 추락 직후의 충격으로 부상을 당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게다가 일몰이 가까워지면서 추위는 극에 달했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런 위기의 순간, 한 남자가 계속해서 여성들을 구조 헬기에 태우는 장면이 목격됐다. 분명 자신에게도 헬기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여성들과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기회'를 양보했다. 결국 다섯 번째 생존자를 구한 헬기가 가장 뒤에 남겨진 그를 구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극심한 추위와 부상당한 몸으로 더 이상 그는 얼어붙은 강 위에서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실화다. 당시 46살, 연방은행 감독관이었던 아를랑 윌리암스의 얼어붙은 몸은 다음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진 후, 과거를 증언하는 친구들은 그가 극심한 물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물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던 그에게 어떻게 그런 희생정신이 발휘될 수 있었을까. 이기적이고 잔인해 보이는 인간이지만 이런 것 때문에 인간이 위대한 것 아니겠나 싶다.


워싱턴 시 정부는 한 남자의 명예로운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사고 현장 옆에 있던 포토맥 14번째 다리를 그의 이름을 따서 '아를랑 윌리엄스 브릿지'로 개명했다. 사고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고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사고 책임자 처벌에만 목매는 우리와는 분명 다른 구석이 있다. 무엇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까?  무엇이 더 강한 나라를 만드는 길일까? 나에게 '아를랑 윌리암스'는 그렇게 많은 질문을 던지는 이름이 되었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마흔여섯 살의 남자, 그에게도 분명 소중한 가족이 있고 살아갈 미래가 있는 숭고한 삶이었을 텐데... 어떻게 그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할 수 있었을까. 하루키는 그걸 '친절심'이라 표현했다. '친절함'으로는 뭔가 부족한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동감이다. '친절심'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이기심', '경쟁심', '욕심'이라는 단어들 속에 들어 있는 바로 그 '심'이란 글자 하나 때문에 조금은 암울하게만 느껴지던 인간의 속성이 하루키의 '친절심'이라는 단어로 인해서 조금은 위로는 받는 모양이다. 그것이 글의 힘이고 작가의 시대적 역할이 아닐까.


그러면서 그는 한 발짝 더 나간다. 자신이 글을 쓸 때 늘 이 마흔여섯 남자의 마지막 '친절심'을 잊지 않고 있다는 고백이었다. 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쉽고 편안한 문장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겠다는 결심이 때로는 게으름으로 나태해질 때가 많은데, 하루키는 그렇게 게을러지는 자신을 채찍질할 때마다 이 남자를 떠올린다는 것이었다. 글 쓰기가 귀찮아서 자리에 누워버리고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얼어붙는 포토맥 강에서 자신보다 먼저 타인에게 구조의 손길을 양보했던 그 숭고한 '친절심'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참 재밌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낡고 오래된 것들 속에 숨겨진 보물 찾기에 나선 디지털 시대의 젊은이들 역시 나에겐 또 다른 하루키의 '친절심'이다. 조금은 구닥다리 같고, 때로는 애늙은이 같아서 데이트 신청도 제대로 받지 못할 것 같았던 하버드의 두 청년은 그렇게 과거의 낡은 것들에 대한 애정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이제 그들을 향한 구애의 손길은 헐리웃만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날 내가 경험한 두 가지 문화적 자극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몰려다니지 말라', '외롭더라도 너의 길을 가라'. 가만 생각해보면 성공이란 결국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간 자들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싶다.


글: 김덕영





자신의 스토리와 콘텐츠로 단골을 만들어라! '왜 우리는 레드오션,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서만 살아남으려 하는가?' 인적도 드문 서촌 골목길에서 3년을 살아남은 한 까페 이야기.


나이 들었다고 인생을 포기할 순 없다. 오히려 그때부터 재밌는 인생이 시작된다. 그렇게 멋진 인생을 살다간 30명의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부제: 뒤늦게 발동걸린 사랑이야기. 가슴 절절한 중년들의 사랑이야기. '당신은 지금 진정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뭔가 특별한 인생, 재밌는 일상을 같이 공유하길 원하는 분은 언제든 서촌의 골목길로 발걸음을 한 번 옮겨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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