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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생 Oct 30. 2022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있다.

 그런 날이 있다. 이 지구에서 나를 빼내고 싶은 날. 이 지구엔 내 원자 한 톨도 머물게 하고 싶지 않은 날. 악의와 이기가 각자의 정당성을 획득해 소리 지르고 그 모든 구렁텅이를 만든이조차 모른 척 제 입장만 내세우며 무책임하던 시기. 그것은 늘 부대끼고 어렵고 이상했지만, 너무 이상해서 좀처럼 어쩌지 못하고 당하듯 겪어야만 했다. 지옥과 업보와 인과응보와 권선징악 같이 따뜻하고 사려 깊은 말들을 종교처럼 믿고 기대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런 말은 좀체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너무 지긋지긋해서 환멸이 느껴지는 어떤 날들엔, 그곳에선 결코 빠져나올 수가 없을 것만 같아 차라리 나를 이 지구에서 빼내고 싶은 갈망이 일었다. 나는 원자 하나도 나를 남겨두지 않고 지구를 빠져나와 대체로 텅 비었다는 우주 공간을 유한하지만 한없이라고 느껴질만큼의 시간동안 등속직선운동 하는 상상에 잠기곤 했다.

 등속직선운동은 이상하다. 중력과 마찰력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구인인 나로서는 같은 속도로 직선을 가는 것이 아무 힘도 작용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자동차가 같은 속도로 직진한다고 해서 기름을 안 넣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기름이 다 떨어지고 나면 자동차가 멈추는 곳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F=ma이고 등속은 가속도(a)가 0이다. 질량(m)이 어떻건 힘(F)이 0이 되는 수식 앞에서 등속직선운동은 작용하는 힘이 0인 우주의 기본값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뉴턴이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수식은 로켓도 날아가게 하니까. 내가 틀린 것이 맞았다. 그러고 보면 수식이 너무 간단한 것도 문제다. 수식이 어려웠다면 나는 수식 같은 것은 모른다며 더 우길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등속직선운동은 꽤 마음에 든다. 어딘가로 끊임없이 흘러는 가지만 떠밀려가는 것도 아니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무지 좋다. 아주 처음부터 모든 건 시공의 좌표가 늘 달라지게끔 생겨먹었다는 게 말이다. 그건 어쩐지 우쭐함을 주기도 한다. ‘이봐, 봤지? 나를 그냥 두었더라면 나는 우주 끝까지도 갈 수 있는 존재라고. 이렇게 멈춰 있을 게 아니었다고.’ 같은 이상한 자존감. 오래 멈춰있던 게 모두 내 잘못은 아닐 거라는 이상한 안도감.

 지구에 늘 중력이 작용하고 있다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중력을 느껴본 적이 없다. 놀이공원에서 수직낙하 하는 놀이기구가 낙하를 시작하는 순간이나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순간 같이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찰나에 오히려 위로 끌려지는 듯한 힘을 받는다. 허공에 있는 물건이 땅으로 떨어지는 건 잡아주는 힘이 작용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중력의 영향 아래 존재하는 생명체의 직관은 그럴 것이다. 직관이라는 것을 나는 늘 조금 숭배하며 얻고 싶어 했는데 지구가 아닌 우주의 범주에서 보자면 지구인의 직관은 오류가 많다. 내 경험과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하거나 그려볼 수 없는 일들이 우주에는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살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아무도 용서를 구하지 않지만 나를 위해 용서하고 이해하고 싶은 일들이 좀처럼 용서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아도 그건 지구의 관점인지도 모른다. 우주에선 좀 다를지도 모른다. 인간의 언어로 곧잘 냉정이나 비정으로 표현되는 우주의 질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건 때론 인간의 온기보다 더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저러나 우주의 끝을 향해 등속직선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를 우주로 내보내야 한다. 우주에 가서도 방향과 속도에 신경을 써야할 것이다. 물질의 밀도가 가장 낮은 직선의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얼마 못 가 은하단이나 별이나 행성 같은 것들의 중력에 맥없이 끌려갈지도 모른다. 기껏 나갔는데 궤도 운동이나 하는 신세로 전락하는 건 좀 억울하지 않은가. 우주 물질들의 끌어당김을 피하기엔 속도도 빠를수록 좋을 테니 빛 속도의 99.9999% 정도로 가는 것이 가장 안전 하겠지만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다. 목적지를 향해 빨리만 가는 것은 매력적이지가 않다. 앰뷸런스나 소방차처럼 사이렌을 켜고 갈만한 일이 아니라면 빠른 것보다 조금 느린 게 더 좋다. 그것이 조금 더 여행 느낌이 난다. 그러니 속도는 광속의 70% 정도가 좋겠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선심이라도 쓰듯 속도를 정했지만 해결할 수 없는 현실들이 몰려온다. 예를 들면 우주는 어떻게 나가야 하나, 뭐 그런 문제들.

 로켓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구의 물질이 우주로 나가기 위한 방법은 로켓에 실려 나가는 것이 유일한 것일까? 그렇다면 로켓이 발사되기 전까지는 지구가 생긴 이후 지구의 원자가 지구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는 것일까? 기회가 있어 질문을 했던 적이 있는데 확률적으로 매우 희박하다는 답을 들었다. 우주에서 날아온 입자와 충돌한 공기 분자 일부가 큰 에너지를 얻는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극히 적은 비율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액체나 고체의 경우 지구 밖으로 나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하다고 했다. 46억 년 전 지구가 생긴 이래로 지구에 발이 묶여 있을 원자들을 생각하니 아득해졌다. 가족을 잃고 터전을 잃고 자유를 잃은 듯이 안타깝고 막연하다. 원자들은 그런 감각을 않을 테지만 원자로 이루어진 나의 뇌는 원자로 만들어진 신경물질을 그런 식으로 전달한다. 지구에 끌려온 원자들이 없었더라면 그런 생각을 하는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켓이 있다. 액체와 고체로 이루어진 내게 다른 방법은 없지만 로켓이 있기는 하다. 우주 관광 시대가 열릴 것이라던 공상 과학 만화 같은 이야기는 최근 들어 현실화 되기 시작했다. 민간기업들은 유인 로켓 발사에 성공 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올라가는 지상에서 80내지 100km로는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에 부족하다. 국제우주정거장(ISS)이 돌고 있는 고도 300~400Km도 스페이스X의 관광 높이인 575Km도 부족하다. 공전속도가 지구의 자전속도라는 3만6000Km의 정지궤도에 올라가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궤도운동은 결국 지구 중력에 잡혀있다는 말이니까. 나는 보이저처럼 가야한다. 빛으로 17시간이면 가는 태양계 끝을 보이저 1호로 40년 정도 걸렸다니까 보이저 1호보다는 아주 빠르게. 하루 정도에 도달할 수 있게. 상상은 다시 달려 나사로 간다. 나사로 달려가 옷이 가장 후줄근하고 며칠 밤은 샌 듯 보이는 사람의 옷자락을 붙들어 볼까 생각한다. 그 사람에게 기술이 있을지 모른다. 기사가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출근시간보다 조금 늦게 들어오는 비싼 차를 세워볼 계획을 세운다. 그 사람에게 결정권이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붙잡고 제발 나를 물질이 있지 않은 공간을 향해 빛 속도의 70%로 등속직선운동을 할 수 있게 쏘아달라고 애걸하는 상상까지 오면 이 모든 게 원자 한 톨도 지구에 남기고 싶지 않은 기분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어느새 잊곤 한다. 잠시 잊었다는 사실과 함께 다시금 그 지긋지긋한 기분에 매몰되기도 하지만 이 허무맹랑한 가정은 시간을 조금 더 견딜만하게 만들어 준다.

 허무맹랑한 가정이다. 나사가 개인을 위해 로켓을 쏠 리가 없다. 모든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물론 몇 년치 예산을 기부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이 계획에서 가장 불가능한 일이다. 온 세계가 집단 광기 상태에 빠져 나를 우주에 보내주기로 결정 한다 해도 직선방향으로 텅 빈 공간이 우주에 존재하는지, 인류의 기술이 그 경로를 알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나를 광속의 70%로 이동하게 하는 것도 아마 아직까진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이유를 구구절절 대는 것조차 허무맹랑할만큼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내친김에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되고 싶었다. 우주의 가장 텅 빈 곳을 가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아무에게도 관측되지 않고 무엇에도 측정되지 않는 상태가 되어 입자였다가 파동인 상태로 우주를 떠돌고 싶었다. 온도는 0켈빈에 가까워 더 내려갈 지경이 거의 없을 만큼 차갑고 도달할 빛이 없어 반타블랙보다 더 검은 곳에서 말이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 하나도 떨어뜨리지 않고 내 의식조차 나를 측정할 수 없다면 나는 아마도 입자이자 파동인 상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주워들은 이야기를 제대로 주워들은 게 맞다면 이론적으로 가능한 일이다. 모든 허무맹랑한 상상 속에서 그것만은 허무맹랑하지 않을 것이다.

 차갑고 어두운 곳을 빠르게 이동하는 상상을 해본다. 아무도 모르는, 원자 하나조차도 나를 알아챌 수 없는 텅 빈 공간에서 나는 덩어리이다가 물결처럼 퍼져 나가는 모습일까? 파동인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러나 그 모습은 이 우주의 누구도, 그 무엇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 파동인 나를 알아차리는 순간 나는 다시 덩어리가 될 테니. 누구도 목격하지 못했지만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존재가 아무리 자신을 존재라 주장해도 입증이 불가능 하다면 모두들 허상으로 치부하지 않을까?

 물질도 없고 대기도 없는   공간은 이동하고 있어도 이동에 대한 자각이 없을 것이다. 풍경의 변화도 스치는 바람도 없으니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 물곰도 아닌 인간이 영하 273.15도에 근접한 우주를 그렇게 누비고 있다면 자각이란  원체 없겠지만 자각을 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동하는 것일까? 멈춰있는 것일까? 좌표는 달라지겠지만 측정되지 않은  좌표의 변화는 아무도 알지 못할  아닌가. 아무도 모른 다는 것은 가끔 그리운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어느 날엔 운 좋게 우주의 끝에 가닿는 상상을 한다. 우주의 끝을 본 적이 없으니 영화 트루먼쇼에 나오는 세트장의 끝 같은 것을 상상하곤 상상력의 빈곤을 탓하기도 한다. 또 어떤 날엔 우주의 끝에 다 가기도 전에 빅 크런치 되어 한 점으로 다시 끌려가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이도 저도 귀찮은 날엔 그저 차갑고 어두운 우주에서 등속직선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만 떠올리기도 했다. 오롯이 혼자인 공간. 그 공간이 주는 절대적인 고요. 시끄러운 생각들을 그곳에 부려놓으면 소란은 뮤트 된다. 공기가 없는 우주에서 소리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고통은 사라진다,면 좋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생각들은 이내 시끄러워진다. 소리는 공기가 있다는 증거이니 더 이상 우주 공간이 아니다. 나는 다시 현실로 끌려온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왜 그렇게 됐는지, 왜 여기 이렇게 서있게 됐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그 현실 공간으로 말이다. 그렇지만 아까와는 다르다. 한바탕 잘 놀고 막 내린 공연장을 떠나는 관객의 기분이 되어 돌아온다. 뭐가 중요하겠는가 우주는 그렇게나 넓은데 같은 체념과 인정과 희망과 함께.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이해할 수 없고 모르겠는 일들이 살다 보면 많지만, 혹은 거대한 한 두 개가 생을 통으로 엉망이 되게 하겠지만, 실은 그보다 더 모르겠는 건 이 우주여행에 얼마나 많은 과학적 오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주 기본적이고 간단한 가정부터 틀렸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고 주워들은 것이 더 늘어나면 내 생각의 터무니없음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질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어둡고 차갑고 고요한 우주 공간에 가게 된다면 세상 누구보다도 먼저 공포에 질려 제발 나를 지구에 데려다 달라고 들리지도 않을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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