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일러 이해할 수 없었던 이야기
대학시절 나보다 많이 산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말 중에서 유독 마음에 오래 남아있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오늘 이 글을 쓰게 만든 말.
매주 한 편의 시를 작성해 오고 수강생 전체를 대상으로 공개 합평을 진행하던 '시 창작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내 시를 보고 이런 말을 하셨다.
"이런 친구들은요, 늦돼요. 늦되다는 건 나쁜 게 아니에요. 그만 오해를 해서 자기 자신을 미워하거나 사람들의 시선에 상처받거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그날 내가 써간 시를 칭찬해주셨다. 1학년 때부터 세미나를 통해서도 매주 내 시를 봐오셨지만 한 번도 칭찬해주신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칭찬을 해놓고서 알쏭달쏭한 말을 덧붙였다. 그때 난 대학교 3학년이었다.
늦되다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에, 그때 나는 너무 짧게 살아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20대의 한 해 한 해는 끔찍하리만큼 길었고 왜 견뎌내야 하는지, 이 시간의 끝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 같은 시간들이 흘러갔다. 올해로 난 서른 살이 됐다. 병원 나이론 아직 29살이지만, 30대의 문턱을 넘은 것만으로도 길었던 20대로부터 한걸음 걸어 나온 것 같아 후련하다.
요즘이 되어서야 비로소 스스로를 돌아보며 '어쩌면 조금 늦되는 사람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 나이가 서른이라는 실감은 아직도 한참 모자라고, 사회적인 시선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경제적인 사정이든, 정서적인 부분에서든 내가 생각하던 서른도 어른도 나는 아니다. 그러다 보니 나이라는 것은 신체적인 지표의 일종 밖에는 못되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보다 소화가 잘 안 되고, 예전처럼 아주 매운 떡볶이를 기분이 꿀꿀할 때마다(그러니까, 자주) 즐길 수 없고, 밤마다 혼자 홀짝거리기 좋아하던 와인이든 맥주든 이제는 속이 쓰리고 두통이 몰려와 거리를 둔다. 카페에서도 커피보다 차를 선택한다. 겨우 서른에 무슨 앓는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신체적인 면에서 나이 듦은 정신적은 면보다는 훨씬 더 실감 나고 받아들여지는 변화들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나이는 신체적인 나이와 비례할 수 없겠다. 진단해보건대 지금 나의 정신적 나이는 스물셋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 '스물셋'은 이 땅을 살아가는 스물셋 들의 현실적인 평균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 머릿속에 있는 관념적인 스물셋이다. 가령 아이유의 노래 '스물셋'에 등장하는 진술이 이제야 공감된다든지 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들.
한 떨기 스물셋 좀/ 아가씨 태가 나네/ 다 큰 척해도 적당히 믿어줘요
얄미운 스물셋/ 아직 한참 멀었다 얘/ 덜 자란 척해도/ 대충 속아줘요
최근 아이유의 '스물셋'을 들으면서 갑작스레 가사에 공감이 갔었다.
서른, 분명 인생을 조금은 살아봤다고 느낄 나이일 줄 알았는데 주위에선 제법 '아가씨 태가 난다'거나 '아직 한참 멀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는 '다 큰 척하는 덜 자란'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서른 살이 되어서야 겨우 스물셋 쯤 되는 마음을 가지게 되다니 몸과 마음의 간극을 생각해볼 때 나는 몸보다 마음 쪽이 늦되는 사람인 것이 맞다.
작년, 그러니까 스물아홉 까지만 해도 이러한 간극을 '늦됨'이라기보다 '늦음'으로 받아들이고 조급할 때가 많았다. 그러한 늦음의 이유를 어디서 찾느냐에 따라 매일 원망의 대상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미워한 사람은 나였다.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고개를 갸웃거려봐도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미워하던 마음이 맥없이 꺾이고 힘이 풀려버렸다.
그냥 늦되다는데, 그럼 기다려주면 되지 다그치고 괴롭혀서 뭐 해.
이런 관용이 다른 사람들에게라면 몰라도 스스로에게는 좀처럼 베풀어지지가 않았었는데 예전보다는 한결 호의적이다. 애써봐야 별 볼 일 없다는 걸 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꿈과 절망 -김승희
나대로 살고 싶다
나대로 살고 싶다
어린 시절 그것은 꿈이었는데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이 드니 그것은 절망이로구나
예전에 읽었던 이 시가 생각났다. '나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바뀌어가는 동안 꿈은 절망이 되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하지만 그 절망이 그리 슬픈 것만은 아니었으리라고 오늘에서야 나는 짐작해본다.
'나'라는 명백하고도 현실적인 한계는 그 자체로 절망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해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절망을 디디고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시작을 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의 꿈은 희망찬 한편으로 부서지기 쉬운 무른 것이었다면 늦되게 자라 가는 지금의 꿈은 절망 가운데서도 차마 다 버리지 못한, 더 단단하게 익어가는 무엇이다.
남들처럼, 내가 동경하던 책과 영화의 주인공처럼, 또 그들로부터 얻은 단상으로 내 머릿속에 키운 이상적인 '어른'처럼 되지 못했어도 나는 나다.
조금 늦되고 불건전한 나와 살아가는 법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