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머무는 자리

빛과 어둠 사이에서 드러나는 삶의 속삭임

by 얼웨즈 Always
빛과 그림자는 늘 함께 존재합니다. 담벼락 위에 드리운 그림자처럼 삶도 선명한 날과 흐린 날을 오가며 흔들립니다. 그러나 그 변화 속에서도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흔들려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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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는 본질을 바꾸지 않는다


오후의 햇빛은 생각보다 정직합니다. 수원 화성행궁의 담벼락 위에 내려앉은 빛은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이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오래된 흙벽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품고 있고, 그 위에 얹힌 기와는 단단하게 시간을 버티고 있습니다.


옆에 서 있던 나무는 바람을 타고 미세하게 흔들리며 자신의 존재를 그림자로 남깁니다. 햇빛이 강하게 내려앉을수록 그림자는 더욱 또렷해지고, 담벼락 위에는 마치 누군가가 판화를 새겨놓은 듯한 형상이 만들어집니다. 나무의 가지 하나하나, 기와의 곡선, 그리고 담벼락의 거친 질감까지 모든 것이 빛을 통해 드러나며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그러나 이 선명함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구름이 끼면 그림자는 흐려지고, 바람이 거세지면 나무의 형상은 흔들려 제대로 남지 않습니다. 같은 자리에 서 있어도 같은 풍경을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우리는 늘 선명한 날만을 기대합니다.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이고 방향이 분명하며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는 날들을 바라지만,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떤 날은 햇빛이 부족해 무엇 하나 분명하게 보이지 않기도 하고, 어떤 날은 빛은 충분하지만 바람이 너무 강해 모든 것이 흔들려버립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유를 찾으려 애쓰며 당황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자연이 그렇듯 우리의 삶 역시 일정한 리듬 속에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맑은 날과 흐린 날, 고요한 순간과 거친 순간이 번갈아 찾아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좋은 날만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흐린 날이 찾아오면 외면하려 합니다. 괜찮은 척 지나가기를 기다리거나 애써 모른 척하며 마음을 덮어버립니다.


그러나 담벼락 위의 그림자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빛이 강할 때는 또렷하게 드러나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며 형태를 바꾸며, 구름이 끼면 사라지는 듯 보이다가 다시 빛이 돌아오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과정 속에서도 그림자는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입니다.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흔들리고 있다고 해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니며, 흐릿하게 보인다고 해서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단지 지금의 조건과 환경이 그렇게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종종 결과로 자신을 판단합니다. 선명한 날에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고, 흐린 날에는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착각에 가깝습니다. 담벼락의 그림자가 날씨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서 나무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통제하려 합니다. 날씨조차 바꿀 수 없으면서 모든 상황을 통제해야 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몰아붙입니다. 그러나 삶은 원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바람이 언제 불지, 구름이 언제 끼일지 알 수 없듯 우리의 하루 역시 늘 같은 모습일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햇빛이 강한 날에는 그 나름대로 살아가고, 흐린 날에는 흐린 대로 버텨내며, 바람이 부는 날에는 흔들리는 대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담벼락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며 깨닫습니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 속에도 시간과 빛과 바람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 역시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하나의 풍경일 수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선명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삶은 늘 쨍한 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때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을 만큼 거센 비바람이 지나가기도 하고, 햇빛 속에서도 방향을 잃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은 결국 지나갑니다. 그래서 조급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이 어떤 날이든 그것은 영원하지 않으며, 흐린 날도 흔들리는 날도 지나가고 다시 빛이 드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오늘 하루가 완벽하지 않아도 의미 없는 하루는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사이에도 우리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으며, 그 시간들이 모여 결국 우리의 형태를 만들어갑니다. 그러니 잠시 흐려져도 괜찮고, 잠시 흔들려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