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도 라일락 향기가 머물기를 소망해본다
"무채색 일상의 틈새에서 만난 라일락 향기,
그 찰나의 멈춤이 메마른 마음을
울긋불긋한 봄의 문장으로 물들이다."
무채색의 끝에서 만난 울긋불긋한 안부
세상의 모든 시작에는 저마다의 색깔이 있다고들 하지만, 유독 봄만큼은 그 색채의 잔치가 화려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사실 꽃이 어디 봄에만 피는 것이겠는가. 뜨거운 태양 아래 자태를 뽐내는 여름의 능소화도 있고, 찬 바람 속에서도 꼿꼿이 고개를 드는 겨울의 동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꽃’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무의식중에 ‘봄’이라는 계절을 먼저 마중 나가는 이유는, 아마도 결핍 끝에 찾아온 풍요가 주는 감동 때문일 것이다.
길고 긴 겨울이었다. 생명의 기운이 땅 밑으로 숨어버린 계절 동안, 우리가 마주한 세상은 무채색의 일관이었다. 회색빛 아스팔트, 잎을 떨군 채 뼈대만 남은 나무들, 그리고 사람들의 무거운 외투까지. 그 삭막함의 끝자락을 타고 온통 울긋불긋하게 세상을 물들이는 봄의 등장은 그래서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넘어선 일종의 구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린 시절 우리가 목청 높여 부르던 동요 ‘고향의 봄’ 가사를 떠올려 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가사 속에는 단순히 꽃의 이름만 나열된 것이 아니다. 삭막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가 기어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안식처, 그 ‘꽃 대궐’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 있다. 그 속에서 뛰놀던 때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쩌면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우리 마음속 한 구석에 화사한 봄날의 색채를 간직하고 싶다는 열망일지도 모른다.
낯선 길 위에서 마주한 반가운 손님
분주한 일상이었다. 모니터 속 숫자들이 눈을 피로하게 하고, 끊임없이 울리는 메신저의 알림음이 정신을 갉아먹던 오후였다. 잠시 업무의 굴레에서 벗어나 짬을 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걷기 시작한 길은 평소에는 잘 다니지 않던 낯선 골목이었다. 익숙한 풍경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 때쯤, 어디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렬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후각은 오감 중에서도 기억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던가. 그 향기는 마치 잊고 지냈던 오랜 친구가 등 뒤에서 어깨를 툭 치며 아는 체를 하는 것처럼 친근하고도 압도적이었다. 향기가 이끄는 대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하얀 라일락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하얀 꽃잎은 오후의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았다. 짙은 녹음의 잎사귀 사이로 촘촘히 박힌 작은 꽃송이들은 마치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 같기도 했고, 갓 피어난 순수함 그 자체 같기도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앞에 멈춰 섰다. 강렬한 향기는 후각을 자극하는 것을 넘어 온몸의 감각을 깨웠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며 코를 킁킁거렸다. 타인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이 라일락과 나, 그리고 우리 사이를 채우는 농밀한 향기만이 세상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라일락은 참 묘한 꽃이다. 장미처럼 화려한 자태로 시선을 사로잡기보다, 보이지 않는 향기로 먼저 사람의 마음을 훔친다. 눈을 감아도 그 존재감을 숨길 수 없는 꽃. 그 강렬한 생명력 앞에 서니, 업무의 고단함은 어느새 먼지처럼 흩어지고 마음속에는 하얀 꽃잎의 잔상만이 가득 차올랐다.
선율 위에 흐르는 기억의 조각들
꽃을 바라보고 향기에 취해 있다 보니, 머릿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익숙한 멜로디가 흐르기 시작했다. 가수 이문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라는 노래다.
"라일락 꽃 향기 맡으며, 잊을 수 없는 기억에..."
누구에게나 향기로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그 가사처럼 라일락 향기는 우리를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 데려가는 타임머신과 같다. 첫사랑의 풋풋한 기억일 수도 있고, 고향 집 골목길에 피어있던 라일락 나무 아래서 나누던 소소한 대화일 수도 있다. 혹은 그저 아무 걱정 없이 봄볕을 즐기던 어느 평온한 오후의 느낌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이 낯선 길 위에서 만난 라일락을 보며, 나만의 ‘잊을 수 없는 기억’ 한 페이지를 새로 썼다. 치열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에서 잠시 비켜나, 꽃 한 송이에 마음을 뺏길 수 있는 여유를 가졌던 오늘 이 시간이 미래의 어느 날 나를 다시 행복하게 할 기억의 조각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아마도 오늘 하루는 종일 이 노래를 습관처럼 흥얼거리게 될 것 같다. 입술 끝에 맴도는 가사와 코끝에 남은 라일락 향기가 동행하는 퇴근길은 얼마나 평온할까. 행복은 멀리 있는 거창한 성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업무 도중 우연히 만난 꽃 한 송이, 그 향기에 이끌려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마음, 그리고 그 여운을 노래로 이어가는 소소한 감수성 속에 진짜 행복이 숨어 있다.
우리 삶에도 라일락 향기가 머물기를
라일락의 꽃말은 ‘첫사랑’과 ‘젊은 날의 추억’이라고 한다. 오늘 내가 마주한 하얀 라일락은 나에게 잊고 지냈던 삶의 설렘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라는 무채색 도화지 위에, 오늘 만난 라일락은 하얗고 눈부신 수채화 물 한 방울을 톡 떨어뜨려 주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다음’을 기약하며 현재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산다. 꽃이 지면 내년에 다시 피겠지만, 오늘의 이 햇살과 이 바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내 마음은 오직 지금뿐이다. 그러니 만약 당신도 길을 걷다 이름 모를 향기에 발길이 멈춘다면, 바쁜 걸음을 잠시 늦추고 그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셔 보길 권한다.
오늘은 하루 종일 라일락 향기를 품은 채 노래를 흥얼거리며 행복해하는 나 자신을 상상해본다. 내일 다시 업무의 폭풍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겠지만, 내 마음의 한쪽 구석에는 하얀 꽃잎이 내려앉은 ‘꽃 대궐’이 지어져 있을 것이다. 그 꽃 대궐의 향기만으로도 당분간은 충분히 따뜻하고 넉넉한 봄날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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