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초상

움직임의 흔적, 유년 시절의 기억

by 얼웨즈 Always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아이의 움직임은 여러 겹으로 쌓인다.
시간과 기억이 맞닿은 순간, 사진은 사라진 유년을 조용히 불러낸다.



오래전 여름, 유난히 햇빛이 강했다. 바람은 거의 없었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등이 따뜻해졌다. 서울랜드 미술관 쪽을 걷다가 분수 앞에 잠시 멈췄다.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발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 있었고, 물은 일정한 간격으로 솟아올랐다 내려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중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분수가 올라오는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물 사이를 빠르게 지나갔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시 돌아와 같은 일을 반복했다. 뛰다가 멈추고, 멈췄다가 다시 달리고, 가끔은 물을 피해 가려다 일부러 더 깊이 들어가기도 했다. 옷이 젖는 건 이미 중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사진을 찍은 건 그때였다. 아이를 정면으로 오래 바라본 것도 아니고, 대단한 구도를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순간이 지나가기 전에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각대를 고정시키고 다충노출을 이용하여 연속으로 4컷을 촬영했다.


사진 속 아이는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분명 한 아이인데, 여러 시간대의 아이가 한 자리에 모여 있는 느낌이었다. 그 모습을 괜히 오래 바라보게 됐다.


“그 여름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해주었다.”
— 레이 브래드버리, 《민들레 와인》


그러다 문득, 20여년전 여름이 떠올랐다. 30이 넘은 어른인 내가 창피함도 모른채 아이들과 함께 분수 앞에서 신발을 벗고 뛰어다닌 적이 있었다. 집 근처 공원이였고, 아들, 딸과 함께였다. 젊잖고 고지식한 분들이 옆에서 뭐라고 했는지, 몇 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물에 젖은 발로 바닥을 밟을 때의 차가운 감촉, 옷이 몸에 달라붙던 느낌, 그리고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올 때 괜히 한 번 더 뛰어들던 마음만은 아직도 또렷하다.


그때의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 시간이 나중에 기억이 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여름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그냥 그 순간이 전부였다. 몸이 먼저 움직였고, 웃음이 먼저 나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오히려 가장 완전한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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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하지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사진 속 아이도 그럴 것이다. 지금 이 시간이 언젠가 떠올릴 기억이 될지, 아니면 전혀 기억나지 않을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물 사이를 오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간 순간들이 더 오래 남는 경우도 많다.


아이의 발걸음은 겹쳐져 있었고, 물은 그 사이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분수 바닥에 반사된 빛이 사진 전체를 밝게 만들고 있었다. 그 빛은 웃음 같기도 하고, 기억 같기도 했다. 분명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사진을 보고 있으면 괜히 시끄러운 여름 오후가 떠오른다.


사진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 같다.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데, 보고 있으면 그때의 공기와 온도까지 함께 떠오른다. 그래서 가끔은 사진 한 장이 긴 설명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무엇을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간이 충분히 충만했다는 건 느껴졌다.


언젠가 이 아이도 분수를 떠날 것이다. 여름은 매년 오지만, 같은 여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아이는 자라고, 발걸음은 다른 곳으로 향할 것이다. 분수 앞에서 놀던 시간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끝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이 이 순간을 덜 소중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사진 속에서만큼은, 아이는 아직 물 위에 서 있다. 뛰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은 채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 겹쳐진 움직임은 사라지지 않고, 젖은 바닥 위에 남은 빛처럼 그대로 남아 있다. 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조용해진다.


사진은 그렇게 지나간 시간을 붙잡지 않고, 가만히 놓아 둔다.

오늘은 그 사실이 유난히 고맙게 느껴졌다.



“우리는 여름을 병 속에 담아 둘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름을 살아낸 사람은, 평생 그 맛을 잊지 않는다.
햇빛이 피부에 남긴 감촉, 공기 속에 섞인 웃음,
그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기억 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발효된다.”
— 레이 브래드버리, 《민들레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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