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첫 외제 청소기는 핸디형 Electrolux(스웨덴 브랜드)였다. 아마도 2000년대 후반즈음이었는데 그전까지는 항상 국내브랜드 제품만 썼었다.
집안 요리조리 끌고 다니다가 청소가 거의 끝날즈음 뚝하고 껴졌다. 배터리가 다된 건가 싶어서다시 켜보면 10여 초간더 작동되고 꺼졌다. 그리고 다시 켜면 조금 더 짧게 작동되다 꺼졌다. 그렇게 대여섯 번을 껐다 켰다 하면서 다시는 전원이 안 들어올 때까지 청소기를 괴롭히며 마무리했다.
아니, 이렇게 더 작동할 수 있으면 끝까지 켜있지 왜 귀찮게 껐다 켜게 만든담
그전까지 쓰던 국산 핸디 청소기들은 충전량을 완전히 다 소비할 때까지 쥐어짜는 소리를 내며 푸드드득 작동하다가 꺼졌기에 새로 산 이 청소기는 최선을 다 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내가 약 2년 간 살아 본 스웨덴이 딱 그랬다.
대도시 중심가나 생필품가게를 제외하고는 많은 상점들이 6시(대략 일몰 시간)를 기점으로 문을 닫는다. 점심시간 3~4시간만 장사하는 음식점도 있는가 하면 주말에는 문을 닫는 곳도 있었다(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아이스크림가게는 여름 한 철만 연다). 서울에는 24시간 영업은 물론, 자정을 넘긴 캄캄한 새벽까지 문을 여는 음식점들이 많기에 스웨덴 가게들은 장사를 할 의지는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드는 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불평하는 이들이 없었다. 상점들이 일찍 닫고 저녁이나 주말 외식 장소가 적은 것이 불편하지 않냐는 물음에 '그들에게도 가정이 있잖아'라고 했다. 이전에는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는 관점이었다. 한국에서는 이 말이 '부양할 가족이 있으니 돈을 더 열심히 벌어야지'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가족의 의미가 식구(食口) 임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비록 장사(서비스업)를 하다 보면 남들보다 늦은 식사가 될 수 있겠지만 그들은 가족과 함께 식사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재충전하는 시간이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쳇바퀴 같은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문득 오늘은 소파에 가만히 누워 둥둥 떠다니는 구름이나 멍하니 쳐다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절대 나태해진 게 아니다. 내 몸과 마음이 쉬어야 할 때임을 알려주는 정직한 신호다.
그래서 일반적인 성인의 생체리듬에 맞춰 주 1~2회 휴일이라는 것을 정해놓고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 우리가 꼬박꼬박 딱 정해진 8시간만 노동하던가. 왕복 두 시간 출퇴근 지옥철에서 버티는 노동은 물론이요 저녁식사를 빙자한 상사 눈치보기 게임은 습관적으로 발생한다. 이 정도도 끝나면 양반이다. 내가 집으로 출근하는 것인지 회사로 출근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되도록 집은 잠만 자는 곳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니 어느 날 문득,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매일매일 하루를 버티며 살아내고 있다면 번아웃(burnout)이 오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최소한 의무적인 휴식시간을 가져야 한다.
스웨덴살이를 마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아이러니한 휴무안내를 제주도에서 보았다.
Photo by Sookyong Lee
갑작스러운 휴업도 아니고 정기휴무일인데 왜 죄송해하시는지 의아했다. 이 가게를 운영하시는 분도 쉬어야 더 나은 서비스든 일관성 있는 서비스든 최소한 나빠지지 않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
그리고 얼마 전 동네 열쇠가게 앞을 지나다 미소가 지어지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쓰린 글을 본 적이 있다.
아들 결혼식이 있어 오늘 하루 쉽니다. 죄송합니다.
몇십 년 열쇠가게 하시면서 드디어 아들 장가보내시는구나 싶어 우리 부모님 세대 노고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죄송합니다'라는 문구에 씁쓸해졌다. 경제상황 상 누구라도 일하지 않으면 안 됐던 7~80년대 습성을 왜 못 버리 신 것일까. 헛걸음하게 해서 미안한 상황은 알겠으나 이게 죄송하기까지 할 일인가 모르겠다.
우리 부모님은 안 그러시길 바라는 마음에 휴무공지 문구를 새로 만들며 오지랖을 부려본다.
오늘 우리 아들 결혼해서 하루 쉽니다 축하해주세요^^
근처 OO열쇠, XX열쇠는 열려있습니다
쉬는 것은 나쁜 게 아니다. 목적 없이 할 일 없이 한량이 되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일정한 일을 한 뒤에는 그에 걸맞은 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니까. 보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싶으니까. 할 수 있을 때까지 하고 다음을 위해 충전의 시간을 갖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할 수 있을 때까지라는 말 뜻이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가 아니라 '지치기 전까지'라는 것이다. 예전에 펌프에서 물을 끌어올릴 때 마중물이 있어야 했듯이 재충전을 위해서는 적정한 에너지를 남겨둬야 한다. 그래야 재충전 중에 마주치는 나와 타인에게 불필요한 화를 낼 일이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