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정세랑 작가의 소설집
피프티피플이라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나로서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소설들을 기대했는데,
9년에 걸친 작품들이 엮여져서 그런지 생각지도 못한 장르의 단편들도 수록되어 있었다.
몇 년에 걸쳐 나눠 쓰여진 소설들이 이상하게 일맥상통하는 듯해서 50명의 인물들이 옴니버스 영화처럼 엮여 있는 피프티 피플이 떠오르기도 했다. 마치 한 소설을 읽은 것처럼 각 단편들 중에 인상깊었던 문구들을 엮어 세가지 주제로 서평을 남겨 본다.
연애할 때는 말이야
근이와의 기념일 전날엔 서울 시내 전철역 곳곳의 물품보관함에 과자와 선물들을 숨겨놓았어.
로맨틱한 이벤트는 연애에서 빠질 수 없는 산물이다.
나는 자고로 이벤트의 귀재라 불리울 정도로 누군가를 놀래켜 주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사실 누군가를 위해 준비하는 이벤트에서 '대상'에 Focus가 맞춰져 있기 마련이지만
나는 적어도 누군가보다 어떤 장치와 요소들로 어떤 타이밍에 얼만큼 놀래킬 수 있을지가
메인 관심사였던 적이 많다.
물론 성공한 이벤트가 많기도 했고, 그런 이벤트들을 나의 이벤트 히스토리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누군가에게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풀어내기도 하고, 군대에서 잠못드는
내무실 선임들을 위해 이야기 하기도 하고, 친구들이 본인 여자친구에게 해줄 이벤트를
문의해 올 때 Reference model로 들려주기도 했다.
사물함도 그 중 하나였는데, 원하는 선물을 얻기 위한 미션들을 수행하는 중간단계로
지하철 락커에 다음 장소를 알려주는 쪽지를 넣는다든지 하는...
지금이야 무한도전이다 런닝맨이다 예능들이 이미 훑고 지나간 진부한 방법일지라도
누군가를 위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답사하고 실행하는 그 순간들이
그 또는 그녀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더욱 깊게 한다는 사실은 진부하지 않은 사실일 것이다.
나는 겨우 근이가 들고 있던 책 제목만을 확인할 수 있었지.
학교 도서관 도장이 찍혀 있어서 얼른 봤거든.
친구가 만든 독서기록 App.('리더스')을 매우 잘 활용하고 있는 요즘
매일 아침 출근길에 책을 읽다 나오는 인상깊은 문구들을 스크랩하고 저장해두었다가
이렇게 책 리뷰를 쓰곤 한다.
일종의 독서 SNS 처럼 팔로잉한 친구들의 서재와 책장 구경도 할 수 있고
피드에는 각자가 올린 책 스크랩 들이 올라온다.
그러다 문득 옛날 도서관에서 책 뒤에 꽂혀있는 독서카드에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적혀있었던 것이 생각나 친구에게 문의 했더니
이미 그 책 정보 page에 들어가면 읽은 사람들과 코멘트들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와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을 또 팔로잉 하게 되고, 그들이 읽은 책을 볼 수 있게 되고
책은 읽을 수록 알아가는 것들이 많은 반면, 읽어야 할 책들과 숙제들이 늘어나는 기분이 든다.
점점 한낱 미물의 지적 탐구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깨닫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 사람은 새벽에 전화해 돌아와달라고 울면서도 매일매일 글을 올리더라.
욕설이 섞인 게시물과 간절한 전화 사이의 간극이 더 소름 끼쳤어.
어쩌면 사랑과 증오는 한 끝 차이일 것이다.
데이트 폭력이나 스토킹 같은 범죄행위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매일같이 사랑하고 다투고 하는 평범한 대중들의 연애사 속에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미워하고 가장 아끼며 증오하기도 한다.
에픽하이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었지.
'우리가 자석같았다는 건 한쪽이 등을 돌리면 멀어진다는 거였네.'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사랑 쪽으로 치우칠 수 있으려면
사랑하는 사람이 익숙해지는 순간 더욱 존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말이 나온김에 '어제 귀 잡아당겨서 미안해 여보. 사랑해'
불행은 보이지 않는 모퉁이 너머마다 서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놀래키고
인생은 그 반복일 뿐이라고 누가 그랬어.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우리 둘은 이제 불행공동체가 된 거라고.
행복의 순간을 만끽하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행복한 순간을 억지로 밀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아픈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지 몰라도 너무 편안하고 행복한 상태일 때,
그 행복이 예기치 않은 사건이나 타인을 통해 깨지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그 평안을 깨는 사람들.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긴 했다.
어떤 아픈 굴곡을 겪고 나면 그 굴곡을 다신 겪지 않기 위해 나오는 방어기제 같은 것이 아닐까?
참 슬픈 일이다. 있는 행복도 모두 잿빛으로 덮어버리는 그 우울감.
극복하는데 매우 긴 시간이 걸리기에 정말로 극복이 되는 건지 모르겠는 그 우울감.
이야기로만 듣는 베이징은 점묘화 같아.
누군가와 함께 갔던 여행지는 기억속에 점묘화로 남는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뚜렷한 상호명이나 장소명, 도시명 들은 기억에 남지 않지만
걸었던 거리와 들렀던 식당, 앉아있던 벤치, 그 주위를 감싸던 공기들이
마치 파스텔톤의 blurry한 색감을 더한 듯한 점묘화로 기억에 남는다.
서로 어렴풋한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 어쩌면 선명한 사진을 보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때가 있다.
최소한의 배려가 필요해 보여
지나치게 짧고 달라붙는 옷을 입고 왔던 것이다.
매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올 때마다 조문객들의 시선이 쏠렸다.
매지의 모든 움직임은 춤처럼 느껴졌고, 생생한 양감이 어쩐지 견딜 수 없어졌고
그에 비해 언니와 관은 아주 작고 납작해도 될 것 같았고.
노출증에 걸린 것이 아니라면,
쏟아지는 시선을 즐길 장소가 장례식장만 있는 것이 아니었더라면,
친한친구에게 그동안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배려했어야 했다.
친구의 친언니의 장례식장에서 마치 런웨이를 걷는 모델처럼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매지는
누군가에게 응당 있어야 할 수준의 배려가 무지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지, 그런 생각이라도 해봤으면 다행인 걸까?
알아차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지적할 수 있는 권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핵심 아닌가?
가끔 회사에서 할 말 하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할 말 하는 문화, 마치 조선시대 사육신을 떠올린다.
회사에서 소위 정규직이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파리목숨인지
서로들 불만이 입 밖으로 대빨 나와도 절대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사람은 없다.
내 안위, 내 신변을 위협 받는 일이 생겨서라기 보다는
내 커리어, 내 진로, 내 승진, 내 평가에 악영향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떤 리더는 본인에게 직언을 서슴지 말라고 하여
Frank Talk을 만들어 시행하게 해놓고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리더는 앞에서는 세상 좋은 사람인 척 다 하고는
뒤에서는 밑에 부장들을 불러다 유교사상 교육을 조직 내 뿌리내리게 한다.
나도 사실 대학교 때 동아리 장을 맡았을 때 술김에 야자타임을 하자던 후배들의 제안을
허락한 뒤 벌어진 사태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할 말이 없어지곤 한다.
적당히 용인되는 선을 넘은 후배들의 잘못도 있었겠지만,
내 스스로 그런 관용을 베풀만한 마음의 준비를 했었나 생각하면, 아니었던 것 같다.
지적할 수 있는 용기나 권력 이전에 할 말 하는 문화의 본질은
어디까지가 할 말 축에 속하는지를 먼저 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듣는 쪽에서 정해야 하겠지.
여자는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도 바퀴벌레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잠결에도 입을 벌리고 자지 않으려 곤두선 노력을 하면서
와이프는 바퀴벌레는 싫어한다.
바퀴벌레야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테니 당연한 말이겠거니 했지만,
와이프가 바퀴벌레를 싫어하는 정도는 내 상상을 넘어섰다.
꼭 바퀴벌레는 와이프가 혼자 있는 때 나오곤 했는데
그 이후로 와이프는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집에 혼자 있을 수 없어
회식하고 오는 날 카페에서 내내 기다렸다.
이사한 집에서도 바퀴벌레가 나오자 바퀴벌레 약을 사다가
집에 50여군데 부비트랩처럼 설치해두고는 바퀴벌레가 나왔던 장소는 다신 가지 않는다.
심각한 수준의 포비아가 나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가 문득 지금은 깨닫는다.
내가 고양이에게 느끼는 공포쯤 되려나?
누군가가 느끼는 공포가 나에게 처음에는 신기한 일이었다가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또다른 접점이 될 수 있구나.
결혼, 그거 말이야
성당에서 하는 예비부부 수업을 추천했고, 절에서 하는 수업을 추천했다.
"네?, 결혼을 절대 안하실 분들이 결혼에 대해 하는 말을 들으러 가라고요?"
나도 사실 결혼 전에 엄마 등쌀에 성당에서 부부교리를 받았었고
법륜 스님의 [스님의 주례사]라는 책을 읽었었다.
결혼이라는 건 해본 사람들이 주는 조언을 들었을 때보다
오히려 결혼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주는 조언을 들을 때 희망적이지 않을까?
결혼해서 서로의 자유를 서로가 구속하는 것이
결혼식에서 맹세했던 언약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고
서로에게 연결된 것이 가끔 개인의 영역을 침범해야만
뼈저리게 아프고 주저앉는 순간에 그 연결의 힘을 발휘해
누구도 줄 수 없는 위로와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
누구에게나 장밋빛이고 순탄할 것 같았던 결혼은
누군가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나 오점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더할 나위 없는 값진 선택이 되기도 한다.
내가 한 선택의 결과를 만드는 것은 배우자도 가족도 조언을 주던 성직자들도 아닌
결국 '나'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애써 모른척 하지만 않는다면
결혼은 더 없는 행복의 길이 되지 않을까?
결혼이 부동산으로 유지되는 거란 생각을 했어
도무지 감당이 안되는 금액의 집을 사고 같이 갚으면서 유지되었을 뿐인 게 아닐까
결혼해서 막 좋은 건 아닌데, 어쨌든 집에서 훌라후프는 돌아가
결혼은 자산 증식의 시작이자 퀀텀 점프의 순간이다
대한민국의 부동산 시장의 특성 상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는 일 만큼
자산 증식의 변곡점은 없으며 결혼이 바로 그 순간이 되는 경우가 많기에
결혼은 부동산 투자와 함께 시작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훌라후프가 겨우 돌아가던 신혼 집에서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외곽으로 이사 온 지금은
훌라후프 세네 개를 동시에 돌릴 수 있지만 출퇴근 조건은 훨씬 열악해졌다.
삶의 가치를 어느 곳에 두느냐에 따라 주택 보유와 결혼 생활 모두 다른 의미를 갖기에,
나는 지금 하고 있는 내 투자의 기로에서
삶의 질까지 높이면서 자산 증식에 성공한 FIRE 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현재를 감내하고 지금 수준에 만족하며 또 다른 미래를 꿈꾼다.
내 생각엔 경기도 전셋집에 거주하는 지금 이 순간도 난 충분히 행복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