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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써니 Mar 02. 2022

Welcome to New York (2)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뉴욕을 배경으로 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그러한 작품들에 노출되며 환상을 품게 되는 도시도 바로 뉴욕이었다. 하지만 "How I met your mother"에서 테드, 마셜, 릴리, 버니가 자신들과는 달리 캐나다에서 건너와 뉴욕에 고작 6년밖에 거주하지 않은 로빈에게 '진정한 뉴요커'의 조건으로 제시한 것들은 뉴욕에 대한 환상을 뒤집기에 충분하다.

 

  1. 자신보다 더 바쁜 사람의 택시를 빼앗아 타볼 것

  2. 지하철에서 남들이 보든 말든 펑펑 울어볼 것

  3. 맨손으로 바퀴벌레를 죽여볼 것


  애석하게도 위의 조건들은 늘 꿈꿔왔던 뉴욕이라는 도시와는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만약 진정한 뉴요커가 되기 위한 조건들이 위와 같다면 아마도 평생 진정한 뉴요커가 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아니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맨손으로 무려 바퀴벌레를 죽이는 불미스러운 일은 살면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므로. 


  물론 고작 10일을 여행하는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로빈과 같은 가짜 뉴요커마저도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둘째 날부터 뉴요커를 열심히 흉내 냈다. 꿈꾸던 뉴욕의 로망을 조금이라도 흉내 내고 가져보고 싶었다. 그러나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심각해지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로 인한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로망 이전에 공포심을 자극했다. 결국 조금이라도 상상 속 뉴요커처럼 행동하고 싶다는 로망의 발악과 전염병이 장악해버린 도시 속 도사리는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자 한 자기 방어적 기제가 뒤섞여 창조해낸 우리만의 '흉내 뉴요커'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셀카봉은 과감하게 포기할 것

  2. 구글맵은 최대한 미리 봐서 길을 외워 놓을 것

  3. 지하철에서 예상치 못한 것들을 맞닥뜨려도 졸지 말 것 (가령, 인종차별)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그저 겁에 질려있었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생존을 위한 '위장 뉴요커'였다고 말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 뉴요커라는 말을 붙이기에도 미안할 정도였다. 둘째 날 아침, 뉴욕에 도착한 지 이제 하루가 겨우 지난 남자와 여자가 지하철을 타겠다며 주위의 눈치를 한껏 보며 긴장한 채로 역에 들어서는 모습은 정말로 뉴요커를 흉내라도 내보자는 다짐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매일같이 지하철을 타고 뉴욕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객차 내에서 시끄럽게 노래를 틀어대는 여자, 지하철 문이 빨리 열리지 않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발을 뻥뻥 차는 남자, 지하철 토큰이 읽히지 않아 개찰구를 훌쩍 뛰어 넘어가는 수많은 여자들과 남자들을 전부 마주하자 뉴욕에 대한 과거의 영광스러운 로망은 희미해졌다. 


  공허한 표정, 빠른 걸음걸이, 소음과 더러움에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한 태도, 어쩌면 진짜 뉴욕에 사는 이들이 매일같이 겪어야 했기에 단련될 수밖에 없는 작은 특징들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 역시 현실과 상상은 다르구나!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을 따라 개찰구를 뛰어넘게 된 그때, 비로소 뉴욕이 나에게 다시 환영인사를 건넨 것만 같았다. 뉴욕에 온 걸 환영한다고. 어휴 아주 고약한 환영인사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무서워했지만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매일같이 타고 다녔던 뉴욕의 지하철,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2021년 12월, 추운 겨울의 뉴욕은 잔혹하게도 간직해왔던 수많은 로망을 박살 냈지만 그 부서진 조각들은 다시 모여 새로운 그림을 완성했다. 내가 상상하고 꿈꾸었던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속의 도시와는 완연히 다른 곳이었지만 또다시 그곳으로 떠나기를 꿈꾸는 것은 모순적이게도 뉴욕의 고약한 환영인사가 그립기 때문일지도. 결국 박살 났던 환상 속 이미지 위에 덧씌워진 현실의 뉴욕은 새로운 환상으로 변해 지금 내가 꿈꾸고 있게 만드는 게 분명하다.


뉴욕의 잠 못 이루는 밤


  42 번가 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14 번가 역에서 멈춰 섰다. 개찰구를 나와 우리는 성공적인 첫 지하철 탑승을 축하했다. 같은 선로에 연달아오는 다른 노선의 열차는 당황스러웠으나 다행히 잘못 탑승하여 맨해튼의 저편 어딘가에 낙오되는 불상사는 없었다. 뉴욕에서의 둘째 날,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상상 속의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한 뉴욕은 펑펑 내리는 하얀 눈과 손에 가득 선물을 든 가족, 빨간 목도리를 한 채로 걸어가는 연인, 길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캐럴과 흰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날씨지만 그와 대비되게도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사람들의 미소 그리고 들뜬 분위기가 가득해야 마땅했다. 왠지 이맘때쯤이라면 센트럴파크 어딘가에서 케빈과 비둘기 아줌마가 만났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의 12월 24일 뉴욕은 하얀색이 거리를 뒤덮기는커녕 조금 더 흐리멍덩한 회색빛이 하늘을 가득 매웠을 뿐이다. 하루 전과 달리 차가운 푸른 하늘은 모습을 감추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저 구름, 구름뿐이었다. 14번가 근처 유니온 스퀘어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마켓은 상상하던 크리스마스의 따뜻함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매디슨 스퀘어 파크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어쩌면 크리스마스에 더 진심인 도시는 서울일지도 모르겠다고.


  영화 'Isn't It Romantic'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알던 뉴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갑작스럽게 로맨틱 코미디 세계관의 뉴욕에 떨어져 버린 주인공은 경악에 가득 찬 채로 반문한다. 누군가 뉴욕에 뷰티 필터를 씌워놓은 게 분명하다고, 자신이 알던 뉴욕의 모습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고. 영화와는 반대로 뷰티 필터를 장착한 채로 뉴욕에 왔던 누군가는 도시에 발을 들인 둘째 날부터 서서히 그 뷰티 필터가 파괴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콩깍지가 다 벗겨지기 직전마다 간신히 뉴욕에 대한 로망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축축한 공기를 더 무겁게 내려앉게 만들 것만 같았던 구름이 모두 걷히고 나타난 새파란 캔버스가 그랬고, 공원에서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아저씨의 몽글몽글한 피아노 연주가 그랬다. 뭔가 뜬금없지만 괜히 뉴욕 같다고 느끼게 해주는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뉴욕과 하등 어울린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해리포터 스토어도 그랬다. 적어도 다녀온 이후 '신비한 동물 사전'에서 주인공 뉴트와 티나가 사건을 해결하겠다며 뛰어다니던, 정작 나는 가보지도 않았던 1920년대의 뉴욕에 대한 향수가 마법처럼 몰려들었으니까. 물론 머글들에게 주입한 가짜 향수일 테지만. 영화 속 모습과 비교해도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이는 빌딩들의 자태는 괜스레 '흉내 뉴요커들'에게 영화 속 상황에 스스로를 몰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12월 24일 뉴욕의 뷰티 필터를 지켜준 것은 크리스마스이브에 걸맞게 빨간색과 초록색으로 빛나는 첨탑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었다. 제목에는 뉴욕의 존재 자체가 드러나지도 않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두 주인공이 영화가 끝나갈 때가 되어서야 운명처럼 만나게 되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전망대. 정작 그 둘이 만나는 건 이브도 크리스마스 당일도 아닌 날이었고 그 개연성도 없고 필연을 가장한 우연에 기대기만 하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두 사람의 로맨스가 그 장소에 부여한 의미는 적어도 나에게는 굉장했다.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도시의 불빛이 가득 차 하늘은 여전히 밝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전망대에서 물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시애틀의 톰 행크스와 볼티모어의 멕 라이언의 마법과 같은 만남을 실현시킨 그 장소에 선 그날, 부분적으로 나마 실현되어 버린 환상 속 뉴욕의 모습에 진정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붉은빛으로 물든 전망대에서 흥분에 가득 차 친구에게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아 나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운명적 만남을 해보고 싶어! 사랑해보고 싶어!"


  뉴욕은 적어도 이 환상은 나에게서 뺏어가지 않았다.

어쩌면 이 도시 어딘가에 있을까?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

코넬리아 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입구에 자신 있게 써져있는 캐치 프레이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빌딩.'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왜인지 뉴욕다웠다. 빌딩 숲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릴 도시 뉴욕에는 정말 수많은 빌딩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영화나 드라마에 줄기차게 모습을 비추는 빌딩들도 있고 끔찍한 사고로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빌딩도 있다. 하지만 10일 동안 빼곡하게 채운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걷다 보면 그저 지나치게 되는 평범한 빌딩들이 가장 즐비하다. 그렇지만 수많은 빌딩들이 가진 각자의 사연을 생각해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라면 재미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뉴욕이기에 영화나 드라마가 부여해준 그 빌딩만의 색다른 사연은 넘쳐흘렀다. 이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몸소 느끼기도 했고.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만큼이나 뉴욕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작품 '프렌즈'에서 매 화마다 등장하는 레이첼, 모니카, 챈들러, 조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과연 맨해튼에 있을까. 늘 지나가는 장면으로 외관만 나오던 아파트였지만 놀랍게도 실제로 존재하는 건물이었다. 그리고 그 아파트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실컷 떠오르는 생각이란 주로 시시콜콜한 의문들이었다. 정말 모니카의 아파트에서는 ugly naked guy의 방이 보일까, 친구들이 매일 같이 모이는 Central Perk는 정말 있을까, 대체 웨이트리스와 셰프 그리고 무명배우와 어딘지 모를 회사지만 그나마 돈은 좀 벌 것 같은 남자가 이 뉴욕의 아파트 월세를 감당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와 같은 질문들. 


  크리스마스이브에 마주한 그들의 보금자리는 중형 트리가 건물 앞에 있다는 것만 빼면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같았다. 아 물론 화면 속 특유의 노이즈 없이 직접 마주하고 있으니 느껴지는 어색함은 존재했지만. 그저 빌딩이라는 껍데기였지만 그 앞에 모여 서있는 우리를 포함한 사람들을 붙잡은 것은 결국 그 껍데기가 불러일으키는 공유된 환상과 감정이었다. 유명한 껍데기들이 가득한 곳, 뉴욕. 그리고 그 유명한 껍데기는 자신을 마주한 사람들에게 유사한 감정과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껍데기 속에는 영화나 드라마가 부여한 이야기 외에도 누군가의 이야기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개인 개인의 이야기가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문뜩 드라마나 영화 속 이야기만큼이나 사랑, 기쁨, 슬픔이 가득할 '그 친구들'의 이야기도 어떤 것일지 궁금해진다.

그때 그 친구들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까?

  익숙한 이름의 빌딩이 즐비한 뉴욕의 거리는 의외로 숫자로 표현된 것들이 많다. 타임스퀘어가 있는 42 번가, 둘째 날 처음 지하철을 타고 내린 14 번가. 나름의 법칙과 효율성에 기반하여 숫자로 표현되는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숫자뿐만 아니라 이름을 부여받는 거리들도 있다. 그리고 빌딩이 각자의 사연으로 무장한 것처럼 거리들도 각자의 이름 속에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그 수많은 거리 중에서 코넬리아 길에는 어느덧 내가 좋아한 지 10년이 훌쩍 넘어버린 가수의 노래가 남아있다. 노래 속 여자가 사랑에 빠지고 남자와 걷던 거리인 코넬리아 길. 남자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를 잃는다면 다시는 걷지 않겠다던 코넬리아 길. 

그녀는 사랑이 끝난다면 걷지 못할 거리라 했지만 사랑의 시작을 꿈꾸는 누군가는 걷고 싶을 코넬리아.

  사랑에 빠져 온 도시가 그의 이름을 소리친다며 기쁘고 괴로워했던 노래, Taylor Swift의 Cornelia Street를 들으며 그 길을 걸었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지만 도시가 내게 소리칠 이름을 가진 누군가와 함께 걷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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