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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써니 Mar 25. 2022

You can fly!

뉴욕을 떠나 마법의 왕국으로

  비로소 2021년을 1 남겨놓고 전광판에 커다랗게 60이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59, 58, 57 서서히 줄어들던 숫자가 10 도달하자 이제는 타임스퀘어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일제히  숫자를 부르짖었다.


   "Ten, nine, eight, seven, six, five, four, three, two, one! Happy New Year!"


  와 내가 뉴욕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이 말을 소리치고 있다니. 이곳에서 새해를 맞이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뉴스나 드라마 같은 거 보면 꼭 지금 순간에 키스를 하던데, 정말로 전광판에서 비추는 사람들은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마스크도 내린 채로!


  물론 그 사람들은 2021년의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차디찬 뉴욕의 아스팔트 바닥에서 10시간도 넘게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이 순간만을 기다린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에 비해 우리의 꼴은 지극히 설국열차의 꼬리칸에 가까웠다. 타임스퀘어 중심의 화려한 불빛이 가득 채운 그곳과는 달리 지나치게 대비될 정도로 어두웠고 출퇴근 시간 2호선처럼 고개만 돌려도 옆에는 사람이 있었다. 미디어에서만 비추던 화려함 속에 가려진 어두움이라고 해야 되나. 그나저나 여기서 마스크를 내리고 하는 입맞춤은 바이러스와의 키스 그 자체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입술을 맞댄 커플. 지독하군 지독해.


  꼴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화장실도 못 간 채로 9시간을 넘게 기다려 새해를 맞이하는 행위 자체도 지독하다면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말 진심을 다해 지독한 인간들이 가득했다. 하물며 역병 마저 멈출 수 없었던 지독한 사랑의 키스뿐만 아니라 뉴욕 여행 온 한국사람들이 모인 오픈 채팅방에서는 이미 차를 빌려서 카운트다운이 끝나고는 해돋이 보러 가자는 이야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정말 지독할 정도로 대단한 근면성실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새해의 첫날, 마침내 나의 가장 지독한 이야기가 시작될 참이었다. JFK 공항에 아직 새해의 첫 해가 채 떠오르지도 않은 이른 시간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이제 뉴욕은 나의 여행에서 중간 기착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건 교환학생에 합격한 그 순간부터, 심지어 캐나다 토론토의 학교였지만 당연스럽게도 내가 반드시 가야 할 곳으로 떠나는 것이 오늘이기 때문이었다. 7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지독하게 짝사랑해온 나의 여행 버킷리스트. 공항 카페에서 20 달러나 넘게 주고 산 더럽게 맛없는 샌드위치를 채 반도 먹지 않고 내려놓고는 창 밖에 주기된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지독할 정도로 간절히 가고 싶어 했던 곳까지 데려다 줄 커다란 쇳덩어리. 게이트 전광판에는 선명하게 목적지가 적혀 있었다. 올랜도. 바로 디즈니 월드가 있는 미국 플로리다의 도시, 지독히도 디즈니에 진심인 인간의 목적지.


  이윽고 탑승한 비행기의 개인 스크린에는 뉴욕에서 올랜도까지는 총 3시간 30분이 걸린다고 쓰여있었다. '피터팬'에서 마법이 가득한 네버랜드로 가기 위해 얼마나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웬디가 하늘을 날아가기 위해서 필요했던 건 단지 어린아이의 순수한 믿음과 팅커벨의 몸에서 떨어지는 요정 가루뿐이었다. 하지만 2022년 1월 1일 내가 뉴욕을 날아서 마법과 동화의 왕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믿음은 차치하고 여권도 있어야 했고 20만 원짜리 비행기 티켓도 당연히 필요했다. 누구는 요정의 도움으로 손쉽게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는 것에 비해 2022년 지구에서 마법을 한번 찾아보겠다는 소년의 방문은 순순히 허락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어코 웬디가 되어보겠다는 소년은 마침내 여정에 오르고 만 것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먹구름과 빗소리가 가득 채운 뉴욕은 이내 사라지고 새파란 하늘이 창 밖을 가득 메웠다. 날씨도 마법을 부린 것일지도. 모두가 창 밖에 펼쳐진 맑은 하늘을 한참 마주 보았다. 지금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는 그들은 무엇 때문에 뉴욕을 떠나 올랜도로 향할까. 친척집을 방문할까, 뉴욕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걸까, 아니면 누구처럼 그저 올랜도에 있는 디즈니 월드만을 바라보고 있을까. 이 커다란 쇳덩어리에는 목적지에 얽힌 각자 나름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디즈니 월드만 바라보고 태평양 마저 건너와서는 여기에 앉아 신나 하는 지독한 사람이 또 있을까. 아마도 없을 걸. 그러니까 똑똑히 들어라 마법과 동화의 왕국이여, 기다려라! 지독한 내가 간다! 각오하라고.


2022.1.1, 올랜도 국제공항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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