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와 라캉
한 3년 전쯤부터 시간이 있을 때면 미술관에 자주 방문하곤 했습니다. 그나마 회사 일을 볼 때 가까운 예술의 전당은 강남 쪽 미팅이 잡혀 있으면 미리 나와서 방문하기도 하고, 다른 일로 주로 강북 쪽에 있을 땐 시립미술관과 대림미술관을 방문하곤 했습니다. 다양한 사진전도, 작품전도 있었지만 나름 그것들을 표현하기에는 나만의 생각이 많이 갇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오인하고 역설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실로 예술, 특히 작품의 세계는 그 표현이 작가의 의도처럼 나름의 한정으로 또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만큼 어려운 분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페인 왕실이 전 유럽을 대상으로 컬렉션 한 유럽중세와 근대 미술품의 전람회장인 국립 프라도 미술관. 이 미술관의 중심은 벨라스케스를 위시한 스페인 예술가들이 중심이지만 둘러보면 라파엘과 르누아르, 뒤러 등 유럽의 유명한 화가 작품들도 다수 보유하고 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페인에서 강력한 철권통치를 형성하던 시기, 그들의 작품에 대한 안목과 욕구가 고스란히 숨 쉬고 있는 미술관입니다. 그리고 이 미술관이 유명한 이유는 단연 The Maids of Honor,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입니다.
Las Meninas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만큼 수많은 예술가들과 이론가들에게 영감을 준 작품은 아마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야와 드가, 마네는 이 작품의 매력을 자신의 그림 속에 표현하기도 했으며, 피카소는 아예 이 작품에 대한 오마주로 여러 편의 연작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또 미술사가 들은 ’시녀들’의 원근법을 분석하며 이 작품이 지닌 진정한 매력의 원천을 밝혀내고자 했으며, 푸코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말과 사물’의 시작을 아예 이 작품의 분석으로 했습니다. 그렇다며 이렇듯 이 작품이 수많은 예술인들에게 영감을 제공하고 다양한 해석을 가능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선 많은 미술사가 들은 이 작품의 사실성에 주목을 했습니다. 마치 스냅사진을 찍은 것 같은 놀라운 기교와 표현력을 근거로 들면서 말입니다. 또 램브란트나 고야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빛의 마술적인 힘마저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데 제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보면 방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란 단 2개뿐 입니다. 화면 오른 쪽 창밖의 빛이 그 중 하나로, 그것이 방 안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면, 또 다른 빛은 남자가 서있는 후경의 빛입니다. 실내로 들어오는 강렬한 빛은 일종의 시각 환기를 이루는데, 이는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화면 전체를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만으론 이 모든 논쟁을 아우르기란 불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작품의 진짜 매력은 암부로부터,그리고 화면의 구성적 측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 논쟁은 과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원근법적 구도를 충실히 따랐느냐의 여부부터 시작됩니다. 스나이더와 코헨은 공동저작인 ‘궁정 시녀들을 감상하고’에서, 그림 속 천정과 벽 사이의 사선을 근거로 이 작품이 완벽한 원근법적 구도를 따르고 있음을 주장합니다. 이 논리에 따라서 이 작품은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사진적인 재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미술사가인 모핏 역시 이 그림이 벨로라는 장치와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해 정확하게 크기와 원근법이 계측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스나이더와 코헨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이 그림이 오히려 원근법적 재구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주장하는 반대 의견도 있습니다. 미술사가인 쉬밋은 소실점을 이용한 원근법의 재구성이 다분히 자의적인 해석에 근거하고 있음을 주장하며 정확한 소실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합니다. 실제로 이 그림의 청소작업이 이루어졌을 때 오른 쪽 벽의 베넷 부분이 몇 센티 높았는데, 이를 통해 많은 학자들은 벨라스케스는 작품이 원근법을 통해 정확하게 구성되기보다는 오히려 작가의 직관에 의해 그려졌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따라서 이러한 입장이라면 우리는 벨라스케스가 원근법의 의도적 변형을 통해 또 다른 무언가를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지 혹은 어떠한 의도도 없던 것은 아닐지 다양한 추측이 가능해질 것 같습니다.
먼저 주목할 만한 작업은 푸코로부터 이어지는 후기구조주의자들의 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푸코와 일군의 이론가들은 작품 분석을 통해 오히려 이 작품의 외연을 확장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선 논의들이 ‘시녀들’의 내재하는 의미와 미적 형식을 드러내고자 몰두했다면, 푸코로 시작된 많은 논쟁들은 오히려 작품 자체를 시대 밖으로 끌어내 소유하고 있는 의미를 들여다보고 계속해서 의문점을 제시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크게 두 가지 해석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데요, 우선적으론 푸코의 분석. 사실 푸코의 기획이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의 분석을 통해 고전주의 에피스테메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는 주체가 사라진 재현, 곧 사물의 질서를 외부에서 부여하는 고전주의 정신이 이 작품 속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주장합니다.
푸코는 그의 초기 저서인 ‘말과 사물’에서 벨라스케스의 이 작품을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말과 사물’은 푸코가representation을 고찰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뜻하는 representation은 말, 문자, 그림 등 일종의 기호를 사용해 대상을 되살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사물 그 자체로부터 멀어졌으며 사물 그 자체와 분리된 채 기호들만으로 이루어진 인식의 체계가 되었으며 이 기호들의 체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따라서 시대적/문화적 에피스테메의 차이가 발생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푸코의 책의 시작 1-1에서 그림을 면밀히 분석하고 자신의 논지를 펼치고 있습니다.
그림에서 화가가 그리고 있는 그림, 화가가 보고 있는 모델. 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음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벨라스케스 자신의 모습은 그림에 열중하기 보다는 한 발자국 캔버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거울 속 왕과 왕비는 유령처럼 흔적으로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교들에는 어떤 교묘한 체계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화가의 시선,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그리고 공주 마가리타의 시선을 일치시키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 시선의 중심에는 유령처럼 존재하는 거울 속 왕과 왕비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시선의 일치 덕분에 화가 벨라스케스는 왕과 왕비의 시선을 소유할 수 있으며 나아가 관람객의 위치에 설 수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람객 역시 마찬가집니다. 화면 외부에서 그림을 관람하고 있음에도 이러한 공통의 시선을 가짐으로서 우리는 왕과 왕비가 될 수 있으며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벨라스케스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렇듯 시각 주체가 확연히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재현하는 표상은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캔버스를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림을 그리던 벨라스케스, 그 누구도 전지적인 관점에서 화면을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가장 드러난 형태의 시각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는 왕과 왕비의 모습은 유령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푸코가 주목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조를 통해 이 그림에는 본질적인 공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그림과는 다른, 시각의 역전이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푸코는 이 그림에는 재현의 어려움으로 인해 재현의 근원이 빠져있으며, 이런 까닭에 이 그림은 주체 없는 재현, 즉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재현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사실 많은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재현에 있어서의 리얼리즘의 문제, 대상과 상황을 닮으려고 애쓰는 문제와는 별도로 예술은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수가 있습니다.그렇다고 한다면 그 세계의 체계와 자체논리가 중요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순수재현’ 이는 고전주의 시대정신의 반영입니다. 왜냐하면 고전주의에서 인간이란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자 사물의 질서 가운데 하나이며, 이 존재의 장에 있는 사물들을 개념적 도구인 말을 가지고 정렬하는 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물의 세계의 밖에서 '통일시키는 주체'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발생한 근대 인본주의 에피스테메에서 탄생합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사물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특권적이고 초월적인 주체로 태어나고 스스로를 유한한 경험적 대상으로 연구하게 되며, 그 결과 고전주의 시대에 불가능했던 인문과학이 출현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푸코에게 있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고전주의 시대의 재현. 즉 가장 순수한 재현의 재현인 것입니다.
푸코의 분석에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관계는 거울을 통한 반영관계로만 존재하며, 주체가 어떻게 재현의 근원이 되는지,여기에 정신분석이 탐구하고 무의식과 욕망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심층적 탐구는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런 비판의 주체인 마틴 제이와 엘퍼스는 푸코가 이 그림을 수동적인 인간을 바탕으로 한 고전주의라는 에피스테메의 산물로 인식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해석이 주로 바로크 예술임을 강조 현상세계의 객관성보다는 주관적 관점을 더 중요시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제부터 논의할 자크 라캉은 푸코와는 다르게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성을 가르는 원인이 에피스테메가 아닌 시선과 응시의 분열임을 주장하게 됩니다. 자크 라캉은 예술은 인간을 위로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예술이 주체의 눈에 볼거리를 제공하여 주체의 욕망이 충족되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주체의 응시를 빼앗는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캉은 자신의11번 세미나에서 원근법을 적용하지 않고 얼룩이나 스크린으로 설명했던 대상소타자로서의 설명과 유클리드 기하학에 원근법을 적용한 데자르그의 사영기하학을 통해서 더욱 정교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사영기하학을 통해 라캉은 시각적 영역이 보는 주체의 눈에 보이는 세계가 단순히 재현되는 것이 아닌 보는 주체가 육화되어 나타나는 영역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응시에 대한 설명 ‘정신분석의 네 가지 개념‘에서 시각적 영역에서의 주체의 분열은 눈과 응시의 분열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는데, 눈이 주체의 시점이라면 응시는 주체를 바라보는 타자의 시점, 즉 주체가 보이는 시점을 말합니다. 사실 다소 모호하게 느껴지는 이'응시'라는 개념은 이미 우리에게 구토라는 작품으로 익히 알려진 장 폴 사르트르에 의해 희미하게나마 다뤄진 적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저작 ’존재와 무‘에서 주체의 봄에 선행하는 타자의 응시를 열쇠 구멍을 들여다보는 나를 놀라게 하는 타자의 발걸음 소리에 비유했습니다. 즉 은밀한 욕망을 충족시키려던 나를 놀라게 하고 부끄럽게 하는 타자의 시선이 바로 '응시'라는 것인데 물론 실존성 여부에 있어 사르트르와 라캉의 응시는 동일하게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라캉의 응시와 사르트르의 응시가 갖고 있는 타자성, 관계성은 매우 유사하고 또 동일한 효과를 가져 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시선과 응시라는 개념을 통해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어떻게 분석될 수 있을까요? 라캉에게 있어 뒤돌려진 캔버스는 모든 욕망을 자극하는 작동기제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캔버스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를 상상하는 것이 이 게임의 규칙이라는 것입니다. 즉, 푸코가 화가의 시선으로 옮아가는 관객의 시선을 발견해냈다면, 라캉은 화가의 욕망으로 전이되는 관객의 욕망을 밝혀내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소위 주체가 타자의 욕망을 매개로 태어난다는 주체의 변증법을 찾아낸 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간단히 풀이하면 주체는 자신이 차지할 수 없는 타자의 지점에서 자신을 보고자하는 욕망을 갖게 되는 데, 벨라스케스에게 그것은 저 문 뒤에 서서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남자이며, 관객들에겐 그림 속의 벨라스케스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욕망이 투여된 이 기묘한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즉 그림 속 벨라스케스는 관람객인 우리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다른 눈’이 아니라 ‘다른 주체’로서, 소실점이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적 주체를 의미한다면, 이 다른 주체는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에서 ‘진리의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응시의 마주침이 우리 자신에게 무척 낯설고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라캉 이전에 이러한 두려움 즉, 타자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시선의 욕망이 자아로 투사되는 과정은 프로이트에 의해 선취된 바 있습니다.
‘관음증이 결국 대상을 포기하고 주체의 신체를 욕망하게 되며 끝내는 자신을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으로 나아가게 된다.‘
따라서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라캉의 응시란 타자에 대한 시선이 내면으로 투사되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가 말한 노출증의 변형인 것입니다. 다른 점이라면 프로이트에게 노출증이 욕망의 적나라한 전시라는 측면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면, 라캉에게는 이러한 응시가 오히려 자아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부터 기인한다는 데 있습니다. 즉 또 다른 자아의 존재를 느끼는 일종의 도플갱어적 두려움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서 무엇을 보는가는 말 그대로 자유이자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통해 고전예술의 미감을 느끼는 것도,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발견하는 것도 그리고 시선과 응시의 분열을 찾아내는 것. 이 모든 행위는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리고 싶은 얘기는 그 그림을 보는 여러분들이 무엇을 발견하듯, 시선은 이미 저 캔버스 위에 여러분의 또 다른 투사물을 그려내고 있다고 말입니다.
무엇을 발견하던, 나만의 관점으로 발견하는 것...
그것이 진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