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글라이딩 도전기
가을 상공을 가로질러 보자는 일념 하나로 영월로 떠났다. 평소 겁이 많아 놀이 기구는커녕 사방이 투명한 엘리베이터도 꺼리는 터라 패러글라이딩을 하겠다는 선언은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남들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겁이 많아진다는데, 어릴 적 필요 없는 걱정과 겁을 미리 먹어둬서 인지 겁이 점점 없어지는 가보다. 영월은 고속도로에서 표지판으로 본 게 다였고, 패러글라이딩으로 유명하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무지한 채 떠난 여행길이 더 설렜다.
낯선 곳으로의 여행, 특히 국내 여행을 가면 가까운 시장을 들른다. 재래시장에서 산 지역 특산물을 반찬으로 내어 입으로 추억하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시장의 재미를 일찍부터 알았다. 운 좋게도 우리가 간 날이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영월 시외버스 터미널 쪽에서 동강을 건너면 천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입구부터 호떡 냄새가 진동을 한다. 각종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마스크와 보온이 절로 될 것 같은 개량 한복, 경량 패딩 가게를 지나니 먹거리들이 반긴다. 분홍색 고운 조끼를 입고 계신 할머니는 꽃이 그려져 있는 동그랗고 큰 은쟁반에 찹쌀로 된 떡을 길게 올려놓고, 하얀 컵받침으로 조각조각 썰어주신다. 흰 콩고물에 이리저리 굴려진 떡과 투박한 손맛이 봉지에 담긴다. 전을 부쳐 파는 곳엔 이미 빈 막걸리병이 테이블마다 즐비하다. 맑은 가을 하늘, 반짝거리는 동강, 그 앞에서 막걸리를 먹으며 한바탕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잊고 있던 여유가 생각났다. 음주 활공을 할 순 없으니 아이스 박스에 담긴 호박식혜 하나를 집는다. 겉에 생긴 얼음을 훌훌 털고 밥알이 섞이도록 위아래로 돌려준 후 한 모금 마신다. 살얼음이 입안에 동글동글 맴돌고 달큼함이 혀를 감싼다. '캬'소리가 절로 난다. 입구부터 유혹하던 호떡을 종이컵에 받아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들어가듯 뜨거운 호떡과 찬 식혜를 번갈아 먹는다.
간식과 분위기에 취해 있다 문득 하늘을 보니 그제야 영월에 온 이유가 생각났다. 영월 시내에서는 패러글라이딩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데, 파란 하늘을 가르는 빨간 날개들은 단풍이 되어 내린다. 굽이친 길을 따라 봉래산 정상에 오르니 별마로 천문대와 활공장이 나온다. 영월의 아름다운 경치에 한번 놀라고, 코 앞에서 장비를 메고 절벽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에 또 한 번 놀란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장비를 멨다. 몇 개의 버클을 채워주더니 뛰란다. '아직 준비가 덜 됐습니다. 제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세요.'라는 마음의 소리는 "지금요? 지금이요?"라는 말로 대체됐고 다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내 몸인데 누구의 명령을 듣는지 모르겠다. 인형 뽑기의 집게에 잡힌 듯 무언의 힘이 뒤에서 강하게 끌어당겼고 힘을 인지한 순간, 떴다. 발 밑에 아무것도 없다. 비행기가 떴는데, 맨몸인 느낌이다. 숨을 크게 쉬며 천천히 감각을 느껴본다. 단풍 든 나무들 사이 올라왔던 길이 보인다. 여전히 북적이는 오일장과 걸어왔던 시내가 보인다. 파란 슬레이트 지붕들, 초록 페인트 칠해진 건물들이 보인다. 고개를 든다. 보라 물감 풀어놓은 하늘이 있다. 고요하다. 노을과 정면으로 마주한 채 바람소리만 가만히 듣는다. 평화롭고 따뜻했다. 그 순간 뭔가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긴장감과 해냈다는 벅찬 감동의 중간 어느께였나 싶지만, 그 순간에는 하늘과 제대로 통했다는 충만함을 느꼈다. 눈에 조금 더 담아보자 싶을 때쯤, 자갈이 발에 차였다.
우리는 약 5분의 짧았던 비행의 소감을 한참이나 떠들었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상공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노을 지던 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안 무서웠는지, 과장 섞인 말을 붙여가며 남들한테 자랑할만한 모험담을 만들었다. 일할 땐 커피 석 잔 정도 마셔야 나왔던 텐션이 여기선 철철 넘쳐흘렀다. 영월역으로 향하는 길도 역 앞에서 먹던 다슬기 해장국집도 패러글라이딩 얘기를 하는 장소일 뿐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기차에 몸을 싣자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따뜻한 객실에 몸이 녹아 잠깐 졸고 나니 불과 몇 시간 전 일이 오래전 꿨던 꿈같았다. 녹화된 영상을 반복 재생하며 잊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