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죽어도 나는 일말의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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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생을 마감하는 일은 아마도 찰나같이 짧은 인생 순간에서 가장 슬픈 일 중에 하나이다. 죽음이라는 파도가 밀려올 때에는 제각기 다른 상황일 것이다. 죽음의 이유와 시기에 따라 파고가 달라지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상태 또한 피할 수 없는 감정적인 쓰나미에 얼마나 위험한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여파가 다를 것이다. 회의주의적인 관점에서는 죽음은 당연한 이치이며 이승에 있는 모든 행위와 존재는 부질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삶을 우주에서 한 행성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보듯이 아주 총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만 가능하다. 모든 이론과 사회적인 관점은 자신의 이야기가 되면 딜레마를 맞이한다.
부처는 "태어나는 모든 사물은 덧없으며 언젠가는 죽음에 이른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으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와 행하는 자가 일치할 때만 어느 정도 이성적으로 가능한 태도다. 삶에서 많은 일부분을 나누었던 누군가의 죽음이 발생했을 때 대부분은 혼란스럽고, 살아 있을 때 미처 같이 하지 못한 일에 대해 후회스럽고, 임종을 못 본 체로 마지막 단어 또한 들어주지 못해 비탄스럽고, 그리고 장례를 치르며 세상을 바라보는 창으로 발생한 결과를 수용하지 못한 채로 오히려 감정으로 가득 찬 덧없는 이슬들을 세상으로 흘려보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뫼르소처럼 죽음을 그냥 무덤 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소설 속의 그처럼 대부분은 죽음이라는 사건을 처음 전해질 때에는 전보나 소식으로 듣게 된다. 요즘은 임종의 순간을 지켜주는 사람들도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시간이 흘러가며 깨달았다. 죽음이 무엇인지, 세상에 어떤 의지가 존재하는지도 모를 때에 아버지의 죽음이 일어났다.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부터 부친의 부재를 먼저 경험했다. 부재가 선행했고 그 뒤에 그것의 원인인 죽음이라는 개념을 내재화했다. 애초에 아버지라는 존재를 '존재'로 깨달은 것이 아닌 '부재'로 그가 존재했었음을 깨달았다. 융의 말처럼 빛의 형상은 상상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의식화함에 따라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가족이나 친척들이 나의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대단함을 늘 토로해도 나는 일말의 슬픔과 연민을 느낄 수 없다. 그들이 나를 향한 연민은 느껴져도 나는 아버지를 그리워하거나 어떠한의 감정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사람에 대해 감정이 생기려면 최소한의 상호작용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기억하는 일말의 사건들이 나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염원했던 것은 아버지가 주는 경제적인 안정이었다. 이러한 생각에 나를 부조리한 사람으로 바라본다 해도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해명의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이미 세상은 내게 부조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굴러내려 온 바위를 산꼭대기로 다시 밀어 올리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온 것일 뿐이다. 다만 그 바위의 무게를 아버지의 죽음이 더욱 가중한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다. 내 피부가 세상에서 느끼는 차가움, 내 위에서 분비하는 호르몬이 자극하는 배고픔, 그리고 중추신경이 느끼는 외로움 같은 것을 내게서 가볍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아버지를 그리워하진 않지만 그리움이라는 감정으로 변모한 것처럼 착각하여 나는 슬픔을 느꼈다.
원래 삶은 부조리한 것이나 바위의 무게가 가벼워질수록 느껴지는 부조리는 적어지기 때문에 잘 알아채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모두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자살을 피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사회는 존속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부조리를 깨닫기에는 삶은 너무 짧고 신이 만든 보상체계는 세상에 잘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보상작용을 받아가며 자라나지 않았다. 삶은 무의미했고 매일 나 자신을 종결하고 싶다는 충동이 들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나의 모친은 그러지 않았다. 삶의 가치를 나와 형을 기르는 것에 기대어왔으며 잘못된 종교지만 맹목적으로 믿는 신앙심이 그녀를 지금까지 지탱했고 원동력이다. 그녀는 바위를 굴러 올리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헷갈린다. 나는 살아갈 이유가 없는데 그토록 힘겹게 가족을 살려가고 젖먹이고 길러온 엄마를 보면 내가 어떤 대단한 존재라도 된 듯 금방 죽으면 안 될 존재로 착각하게 한다. 하지만 세상의 그 누구도 대단한 존재는 없다. 나는 어느 날 자살로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 시기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 또한 지쳐서 얼마 못 버틸지도 모른다. 내게 살아갈 이유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매번 실패하는 자아도취를 하는 것이 지겹다. 이러한 모순으로 문득 든 충동으로 나는 엄마가 빨리 삶을 마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녀의 죽음은 내게 충분한 자살 동기가 되며 세상은 나의 죽음을 그나마 이유가 있게 받아들이도록 하고 나에게 있어서는 나를 헷갈리게 하는 이가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에 염치없는 조그마한 심적인 짐 또한 사라지는 결정적인 사건이 될 것이니. 지금은 동의하진 않지만 이런 반인륜적인 생각이 들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흐름은 막을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