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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May 06. 2023

보호자는 왜 자꾸 무너지는가

죽음의 5단계

엄마가 숨이 붙어있음에 감사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감사가 죄책감으로 변하기까지는 많은 날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래는 아주 간추리고 간추린 나의 면회 일기들이다.


23년 2월 21일 엄마의 중환자실 첫 면회


엄마가 눈을 떴지만 놀라운 악력으로 내 손을 잡아 쥐어 손이 부어올랐다.

엄마가 열이 많이 난다고 한다.


23년 2월 24일 면회


엄마가 너무 괴로워한다.

내 손을 꼭 쥔 채 눈을 뜨고 두 눈가에 주름이 각인될 만큼 괴로워한다.

엄마는 내 목소리조차 못 듣고 있는 것 같다.

내 손가락을 부러뜨릴 만큼 꽉 쥐고 놔주질 않는다.

정신이 무너질 것 같다.

입가에 묻은 핏방울, 점점 말라가는 엄마의 팔다리, 점점 하얗게 터가는 엄마의 손등과 발등이

나를 너무 아프게 한다.

울음이 새어 나오는데 필사적으로 참느라 가슴이 아파올 지경이다.

엄마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



23년 3월 2일 면회


엄마에게 내가 오는 게 싫으냐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잘 버틸 수 있겠냐는 물음에 간헐적으로 끄덕인다.

콧줄이 아프다고 계속 몸부림치고 덜컥 빠져버린 엄마의 브리지 탓일까 지난 면회와 다른 새로운 흔적의 핏물이 마른 흔적이 보인다.

다 터진 메마른 입술,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엄마는 벙긋벙긋 연신 아프다고 외치는 엄마를 보는 내 가슴이 찢어진다.



23년 3월 3일 면회


엄마의 눈동자가 촛불처럼 일렁인다.

허공을 보고 나를 보지 않는 엄마의 동공은 언젠가 촛불처럼 힘없이 픽 하고 꺼질까 봐 엄마의 손을 더더욱 꽉 잡게 된다.

근육이라곤 1g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종잇장처럼 가벼워진 엄마의 팔다리가 속상해.

아파, 아파, 너 가라고 연신 중얼거리는 엄마가 나를 알아보기는 하는지 의문이다.


23년 3월 8일 면회


지난주만 해도 엄마 잘 버틸 수 있냐 묻는 질문에 가끔은 끄덕여주던 엄마는 오늘은 내 손을 뿌리치고

내 얼굴도 보지 않으려 눈을 꼭 감는다.

울음을 삼키고 오늘도 잘 버틸 수 있겠냐는 질문에 절레절레하는 엄마.

엄마 나 가? 나 싫어? 오지 마? 그러니 끄덕이고 내 손을 또 뿌리친다.

아예 몸을 돌려 나를 안 보려고 한다.

엄마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데 나는 아직 엄마를 보낼 준비가 안되어있다.







언제까지 울 거냐는 질문에 나는 매번의 면회 때마다 무너진다

라고 대답해 주었다.

하루하루 안 좋아지는 엄마를 보며 내 욕심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달았다.

처음 엄마가 중환자실에 들어갈 때는 이전처럼 걷고 떠들고 화내고 웃기도 하는 엄마를 바랐다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연명치료에 대해 고민해봐야 하는 시점이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프지만 말아주었으면 으로 바뀌고 이제야 이런 기록들을 꺼내어 다시 되짚어 보는 지금 나의 소원은 엄마와 다시는 눈을 못 마주쳐도 좋으니 그냥 엄마가 자면서 편하게 갔으면, 하고 바뀌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엄마나 청색증이 곳곳에 퍼져가는 엄마를 보는 내 가슴은 찢어진다.

나의 하늘이 저렇게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데, 자식이라고 마음이 성할까

내가 대신할 수 있으면 대신하련만, 결국 내 아픔에 엄마를 붙잡은 내 심정을 그 누가 알아줄까

결국 내가 선택한 건 평생을 그러지 말걸 하고 후회해도 좋으니 엄마가 원할 때 가고 싶을 때 보내주는 것이다.

지금도 많이 늦었지만.

많은 고통에 엄마가 몸부림치고 하루하루 늘어가는 바늘자국들 투성이를 보고 나서야.




죽음의 5단계가 있다고 했다.

나는 보호자의 5단계가 그것과 다름없다 생각한다.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



처음엔 부정한다.

아닐 거야, 괜찮아질 수 있을 거야, 나아질 거야.


그러나 그것은 왜 나에게 이런 불행이!

 왜 하필 우리 엄마야! 왜 하필 지금이고!

로 바뀌고, 그 분노는 곧 신과 딜을 하려는 마음으로 바뀐다.



주님, 제발!

엄마 살려주시면 제가 진짜 뭐든 다할게요.

엄마 이전처럼 돌아만 갈 수 있다면, 제가 정말 평생을 제 남은 삶을 모두에게 은혜 베풀며 살게요 로.



그 이후엔 우울을 겪는다.

소중한 엄마를 잃게 될 슬픔에 미리 잠겨 버린다.

상실을 아는 자들은 그 상실의 크기를 알기에 더욱더 우울해한다.


마지막은 수용.

이것은 피할 수가 없으며, 누구나 숨을 부여받았으면 반대로 숨이 거두어지는 순간도 오는 것이라는 것.

그 타이밍이 엄마에게 조금 더 빨리 도래했다는 것.

그리고 나의 하늘에게도 죽음이 드리울 것이라는 것.

그것은 숨을 부여받는 생명이라면 누구에게든 순서만 다를 뿐 공평하게 부여받는 것이라는 걸.




모든 단계를 거치고 수용의 단계를 거치고 있다.

이후 나는 상실의 5단계를 겪을 예정이다.

이 모든 단계를 얼마나 잘 다스리고 받아들이냐는 결국 보호자 각자의 몫인 거다.

물론 그에 따른 무너짐 역시도 마찬가지다.

나는 엄마가 요양병원으로 옮겨진 후에는 그 자리에서 소멸되는 기분을 느꼈다.

중환자실 복도에 서서 간호사 선생님이 문을 열어줄 때까지 소리 죽여 울고 무너지던 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이별이 항상 힘든 것은 이별 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내 욕심 탓에서 힘든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나는 이별을 준비한다.

내 욕심에서 오롯이 벗어나기를 매번 바라게 되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면회.

엄마가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려고 여기저기 전화 하는 나의 이 모든 노력이 절대 허사가 아니기를.

엄마가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이 내가 아닐지라도 엄마에게 만남을 성사시켜 주고 엄마가 마음 편히 갈 수 있기를.

그리고 남겨질 "나"는 슬프더라도 엄마는 좋은 곳으로 마음 편히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내 작은 욕심이 신께 지탄받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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