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요, 내 선풍기

이별은 준비가 불가능하다

by Phd choi 최우수

바야흐로 21년 전인 2001년에 톰 행크스 주연의 실화 기반 무인도 표류기인 캐스트 어웨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주인공이 비행기 추락으로 무인도에 갇혀서 4년 동안이나 혼자 원시생활 체험을 하다, 겨우 구출된다는 내용이다. 영화 스토리도 인상 깊었지만, 극 중에 사람이 아닌 배구공 '윌슨'이 기억난다. 무인도에 갇힌 4년 동안 그야말로 말동무자, 정신적 버팀목이자, 내 생각에는 언어를 잊지 않게 해 준 역할도 컸으리라. 그런 윌슨이기에 뗏목을 타고 탈출할 때, 당연히 제일 먼저 뗏목에 태워 바다로 향했으나, 안타깝게도 폭풍 속 파도에 실려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그 윌슨을 보며 오열하는 톰 행크스를 보면서 20대 감성에 가슴이 멍해지는 감정을 느꼈었다. 지금 되돌아보니 감독의 영화 상 복선은 이제 탈출이 머지 않았고, 표류 시 단짝이었던 윌슨의 역할도 다했으니, 윌슨도 자유롭게 해준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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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엔 내겐 윌슨과 같았던 선풍기가 오늘 드디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며칠 전부터 됐다 안됐다 하길래, 약간 불길했는데, 오늘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반응이 없다.


집에 여러 대의 선풍기가 있긴 하지만, 소음에 민감한 내게 가장 고요한 바람을 선사해서, 여름날 열대야 속에도 잠들게 해 줬던 친구였고, 내가 코로나로 신음할 때도 자가격리로 문도 못 열 때도 묵묵히 내 옆을 지켰던, 가족보다 나의 잠든 모습, 힘든 모습을 많이 바라봤던 선풍기였다.


달력은 어느새 10월로 넘어갔지만, 불과 일주일 전까지도 열심히 시원한 바람을 선사했는데, 가을비가 지나고 나면 기온이 떨어질 거라는 일기예보와 함께 마치 이젠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떠나가려 한다. 한여름에 눈 떠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켜놓고 지내면서 모터에서 열이 나면 고장 안 날까 잠깐잠깐 걱정해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하긴 사람도 아닌데 아프다고 병원 신세 지다 세상을 떠나진 않겠지만.


근데 약간 우울한 감정이 더해지는 건, 이미 하늘나라로 가신 우리 엄마, 아빠도 이렇게 설마, 설마 하는 마음속에서 이별의 준비도 없이 떠나보냈다는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이나 물건이나 이별은 원래 급작스럽고, 이별 준비란 그저 후일담에 불과한 것 같다.

잘 가요, 내 선풍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