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가린.
며칠 전 면접을 봤다.
반드시 가야겠다, 가고 싶다, 라고 생각한 곳은 아니지만 붙으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 정도의 회사. 가만히 집에서 있는 것보다 면접 감을 익히고 뭔가 노력이라도 하는 게 필요해서 넣은 곳이었다. 당연히 면접도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 기실 어떤 면접도 부담감을 느끼면서 무겁게 가본 적 없지만.
나를 포함해 총 아홉 명의 지원자가 있었다. 경력 지원자는 나 하나였고, 나머지 여덟 명은 수습 지원자였다. 이곳의 면접 패턴 중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수습직과 경력직의 면접을 함께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경력직 대우를 해달라는 거만한 소리는 당연히 아니다. 보통은 따로 면접을 진행하기 때문에 의문이 들었을 뿐, 일단은 면접에 들어갔다.
상술했듯이 무조건 여길 가야겠다 생각한 곳이 아니기에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면접에 갔고, 가장 기초적인 정보를 제외하고 회사에 관한 이야기를 따로 찾아보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면접관들은 이 회사에 얼마나 간절한지,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길 원했고, 나를 제외한 다른 지원자들은 꽤나 상세하게 회사의 장단점과 자신이 가진 비전을 이야기했다. 그래도 그간 일한 짬과 센스가 아주 허투루 쌓인 건 아니라, 나 역시 준비한 것에 비해 그럴싸한 대처를 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강력한 검증을 받을 거라는 생각을 못 해서 당황스러웠다.
지원자들은 정말 열심이었다. 상반기에 면접까지 올라왔다가 떨어진 지원자도 있었고, 대학 다닐 때부터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던 지원자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장점을 열심히 어필했고, 타 지원자와 비교했을 때 자신이 더 나은 점이 있냐는 질문에 무례함을 무릅쓰고 상대의 능력을 평가절하하며 자신을 내세우기도 했다. 그 비교 대상이 된 나는 이 상황이 그저 우스웠고, 그만큼 그들이 간절하구나 싶어서 듣고만 있었다. (웃긴 건 비교 대상으로 날 써먹었으면서 면접관이 내게 발언권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도 반박할 줄 아는데!)
면접은 점심 전후로 총 두 차례 예정돼 있었으나 오전 면접을 끝낸 후 나는 돌아왔다. 오후 면접을 치르고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내 자리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이처럼 간절한 지원자들의 자리를 뺏어가며 입사할 만큼 대단한 사명감을 가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면접관들이 당연히 나를 뽑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고민하게 만들 정도의 능력은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이미 지난달 합격 통보를 받은 곳을 걷어차고 나오면서 누군가의 기회를 뺏었다는 말을 들었던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잔잔하게 생각이 맴돌았다. 어떻게든 자신이 필요한 인재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자신을 내보이는 다른 지원자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 문득 '내가 그만큼 무언가를 간절히 원했던 적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르렀다. 짧지 않은 28년의 시간을 되짚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재수 없는 소리지만 나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고, 집안의 지원도 나쁘지 않은 편이며, 머리도 평균보다 더 잘 돌아가는 덕에 크게 무리하지 않아도 하고자 하는 일을 해왔다. 생각보다 포기가 빠른 편인 것도 한 몫 했지만 적어도 목표하는 바를 앞에 뒀을 때에는 나름 성실했고, 그 목표치는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세운 것이기에 무리하지 않아도 달성할 수 있었다.
누구나 치열해지고 간절해질 수밖에 없는 고3 입시 때도 그랬다. 이미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고 부모님의 지원을 약속 받은 상황이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지원한 대학에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고, 성적이 조금 아까울 정도로 하향지원한 것도 있었다. 사회인으로 일을 시작하고 이직을 할 때에도 그랬다. 직종을 바꾼 후에도 쉽게 능력을 인정 받았고, 어렵지 않게 좋은 평가를 들으며 다음을 생각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순탄하게 살아온 게 아닐까. 적어도 내 기준에는 그렇다. 아주 많은 품을 들이지 않아도 조금씩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
계속해서 생각하다가 불현듯 답을 찾았다. 지금까지 나는 주변인에게 부지런하다, 성실하다, 열심히 산다는 말을 꽤 자주 들었으나 스스로 이를 동의하지 못했다. 나와 부지런하다, 열심히 산다는 말이 양립할 수 있는 건지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전부 내게 주어진 일을 했던 것일 뿐, 이를 반드시 해내야 한다거나 달성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빠져 있었다. 누구나 살아가는 일상의 삶을 살아간 거지, 특별히 뭔가를 더하고 노력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이 부담스럽고 어려웠던 것이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뭔가를 간절하게 쟁취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쉬고 있지만 내가 다시 글을 쓰고 일할 곳은 언젠가 나올 것이고, 다시 일을 시작하면 이만큼 길고 편하게 쉴 틈이 없을 테니 지금을 즐기자는 생각을 하고 있기에. 그나마 학창 시절에는 친구를 잃기 싫어 교우관계에 무척 간절했던 거 같은데, 그 과정에서 스스로 돌보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에는 미련과 간절함을 많이 덜어내고 한결 편하게 누군가의 손을 놓고 있다.
나에게 가장 어려운 감정은 간절함이다. 절실하고 절박하게 무언갈 원해서,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감정일지 몰랐다. 내가 가지기에 어려운 감정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렇게 안일하고 무사태평하고,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게 정말 괜찮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대로도 제법 잘 살아왔는데,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 태평한 생각이 문제인 것 같은데 또 결론이 이렇다.) 어려운 감정을 억지로 안고 살면서, 간절하지 않은 스스로를 검열하고 지적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 어쨌든 이 역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지 않은가.
그처럼 무언가에 간절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단하고, 그 간절함을 원동력 삼아 나아가는 사람들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간절함이 이 게으른 사람에게도 닿아,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었으니까. 어쩌면 나 역시 나름대로 간절한 것이 있었으나 그들만큼 표출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절실하고 간절한 것 하나쯤 당연히 생길 테고. 그때 다시 이 글을 읽어보면 또 다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지금은 적당한 나를 굳이 탓하는 대신 이대로 살아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