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HUMINT 휴민트〉(2026), 류승완
시스템 안에서 인간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류승완 감독의 〈HUMINT 휴민트〉(2026)는 첩보 액션의 외형을 빌려 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AI가 신호와 영상을 완벽히 처리하는 시대, 시스템이 끝내 대체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감정과 그로 인한 선택이다. HUMINT — Human Intelligence — 라는 제목 자체가 이 역설을 예고한다. 국정원 블랙 요원 조 과장, 북한 보위성 요원 박건,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종업원 채선화. 남과 북의 시스템은 이들을 도구로 운용하지만, 도구로 취급받던 인물들은 감정 때문에 이탈하고, 그 이탈이 예기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류승완의 세계관은 〈부당거래〉와 〈베를린〉을 거쳐 이 영화에서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은 읽기에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 관람 후 묘한 이끌림으로부터 시작된 짧은 리뷰에, 영화의 장면 장면들을 다시 떠올리며, AI가 데이터를 잘게 나눈 청크 단위로 처리하듯 기록한 분석과 의견이 추가로 담겼습니다. 영화 속 도구를 다룬 섹션에서는 '블랙박스'에 대한 이야기가 뒤늦게 추가되었는데, 어두운 방에서 문득 떠올린 것이 그렇게 정리가 됐습니다. 그 부분의 해석은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해 주시기를 당부합니다. (2026-02-20)
AI를 도구로써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깊이 하기도 전에, SNS 피드에는 인간이 AI의 도구로 사용되는 상황을 담은 게시물도 눈에 띄는 지경이다. 언젠가 보겠다며 메모해 두고 최근에야 본 〈Eagle Eye〉 (2008, D. J. Caruso)에서는 머리 굴릴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을 정도로 숨 막히게 AI가 인간을 ‘조종’하는 것이 묘사되기도 한다.
AI와 도구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영화가 개봉한 시기가 마침 인간의 존속 가능성을 심각하게 걱정해야 하는 있는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Human과 Intelligence의 합성어는 철저하게 ‘도구로서 정보원이 취급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분리된 원래의 단어 조합은, ‘Artificial Intelligence’와 상반된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휴민트는, 첫 신부터 묘함이 감지됐다. 잊을 만하면 찾아서 보는 공각기동대(攻殼機動隊 Ghost in the Shell, 1995, 시로 마사무네 원작,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도입부와 너무도 닮아 있다 느꼈기 때문이다. 아니, 닮았다. 이건 오마주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네트워크에 연결 가능한 전뇌와 고도로 발달된 기계 신체를 가진 존재가 아침에 일어나 눈을 비비는, ‘이게 인간의 행위인가’를 조용히 묻는 장면.
영화에서 조 과장은 잠에서 깨기 전에 어떤 꿈을 꾸었으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타국에서의 근무를 시작하는지 궁금해진다. 그저 기계처럼, 평범한 직장인처럼 자신이 속한 조직의 도구임을 충분히 자각하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출근을 위해, 익숙한 듯 기계적으로 책상 위에 놓인 도구들을 하나씩 집어든다.
공각기동대의 도입부에서 묘사된 밝은 창밖은 이야기 끝자락의 희망적임과 연결되어 있었을까? 휴민트 도입부의 창밖은 아침인지 해 질 무렵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없다, 익숙한 자연광이 이토록 모호한 느낌을 준 적이 있었을까. 감독이 던진 주제는 창밖의 분위기처럼 금방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조 과장은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면서 그 모호한 영역을 더하며(전등 켬), 영화 끝에서는 역시 자신의 선택으로 그 영역에서 벗어난다(전등 끔). 다만, 그 벗어남이란 것도 자신이 선택한 시스템 속에 머물러 있기 위한 일시적인 작은 소멸이다. 꿈을 꿀 때 비로소 그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작전 중 ‘인간성을 켜는 스위치’로 동작하는 김수린과 채선화를 대하면서 조 과장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김수린의 추출 지원 불가 결정이라는 시스템 관리자의 배신(기대한 것과 다른 모습) 또한, 그 맥락의 전환이 조 과장이라는 일련의 흐름을 바꾸는 스위치였을 수도 있겠다.
시스템 안에서 인간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처음 영화를 보고 리뷰의 도입부를 썼을 때, 나는 첫 신의 창 밖을 어둡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첫 신을 맞았을 때 나의 기억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요원의 활동 시간이야 대부분 밤일 수도 있겠지만, 붉은 기가 돌기도 하고 다소 희망적인 느낌도 있는 ‘그 색상’이 그렇게 모호하게 정리되긴 처음이었다. 신세계의 이자성도 미션 임파서블의 이썬(Ethan Hunt)도 색상으로 표현하자면 그러할까, 조 과장도 박건도 채선화도 모두 그 스펙트럼 속에 오래 머문다.
국정원의 상급자로는 영화 초반에 한 명이 등장한다. 그에게 요원들은 도구이며, 캐릭터 자체가 시스템을 대변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영화 용어에 '스토리적 장치' 혹은 '맥락적 장치'라는 표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복선과 같은 것들이 그러한 범주로 풀이될 수 있고 영어로는 'Contextual Tool'로 표현될 수도 있겠다.
북한 탈출을 시도하는 무리가 맞닥뜨리는 시체는 《매트릭스》(1999)에서 데자뷔(Déjàvu) 현상을 일으키는 검은 고양이를 떠올린다. 시스템의 균열 발생을 알리는 인디케이터.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난 이들은, 그들을 이끈 배신자 탓에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닿아 있는 영역으로 끌려간다.
다트 핀은 박건의 무기가 된다. 타깃을 조준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정확하게 꽂는 — 그 공격 방식 하나로 박건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효율적인 소품이다. 브로커를 찾아간 박건은 다트 핀으로 그를 제압한다. 이 장면은 후에 브로커가 유사한 방식으로 살해될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뒤에 사용된 공격 무기는 펜이다.
진술서 작성을 위해 제공되는 펜이 종이 뭉치 위로 무겁게 떨어지는 순간은, 그 펜이 가진 맥락이 언제든 달라질 수 있음을 조용히 예고한다.
김수린을 빼내는 과정에서, 조 과장의 총은 설계된 방식과는 다르게 쓰인다. 소란이 생긴 방에 업자들이 들이닥쳤을 때 조 과장은 반사적으로 총을 발포 가능한 상태로 쥔다. 정 처장의 개입으로 총의 사용 맥락이 전환되지만, 그 장면은 동시에 조 과장 자신의 내면적 전환을 대변하기도 한다. 시스템의 관점에서 '요원의 감정적 동요'는 일종의 일탈이다. 조 과장은 그 도구적 실패를, 채선화 구출이라는 인간적 사명으로의 전환을 통해 만회하려 한다.
박건과 황치성의 식사 자리에서는 보드카의 실링 왁스를 제거하는 장면이 꽤 상세하게 묘사된다. 여기에 사용되는 망치는, 헤드 한쪽에는 타격면이, 반대쪽에는 솔이 달려 있다. Beluga Gold Line 보드카에 동봉되는 도구로, 제조사 설명에서는 “hammer and brush” 혹은 “wooden hammer with a brush” 정도로 표기된다. 우리말로 굳이 옮기자면 ‘솔망치’쯤 될까. 도구 자체보다 그 용도와 의식이 중요한 소품이기에 별도의 이름조차 없다. 그 망치는 전용 보드카 병을 여는 맥락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조 과장은 기계적임과 인간적임을 동시에 지닌, 그 망치와 닮았다. 어쩌면 박건과 황치성 마저도. 캐릭터가 이중적이라기보다는, 감독은 의도적으로 그 프레임 위에 캐릭터를 올리고 우리도 그 안으로 끌어들인다. 셋은 어렵지만 둘은 분간하기에 어렵지 않다. 범위를 조금 넓히면, 액션과 멜로로 구성된 영화의 구조 자체도 그 망치의 형태와 맞닿아 있다.
영혼을 가둔 껍데기.
시스템의 일부로 도구로써 기능하는 조 과장은, 다소 기계적인 말투와 표정으로 조수린과 채선화라는 휴민트를 운용하지만, 인간이기에 영혼이 없지는 않다. 감정 동요로 조수린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우리가 이것밖에 안 되냐”며 시스템을 탓하는 조 과장에게 감정 이입이 어렵지 않은 까닭이다.
시스템을 위해 자아를 상실하고 시스템의 일부로 사는 개인에게, 감독은 영화와 이 쉘을 통해 과연 당신은 ’영혼이 있는가?’라며 묻는 듯하다. 그리고, 순백의 조명이 있는 투명한 쉘 안에, 순백의 드레스를 입혀 ‘이게 그 영혼’이라며 외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영혼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라고 울부짖는 듯하다.
〈공각기동대〉의 제목은 영어로 Ghost in the Shell이다. 껍데기(Shell) 속의 영혼(Ghost). 그 작품에서 소령은 자신의 몸이 기계 신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안에 무언가 살아있다고 느낀다. 류승완의 투명 쉘과 함께 영화 휴민트는 공각기동대 원작자와 감독을 향한 헌사로 보이기까지 한다.
영혼을 가둔 쉘은 역설적이게도 총알을 막는 방패로도 쓰인다. 여기에도 쉘이라는 도구는 맥락의 전환을 이루어 낸다.
조 과장은 자신의 휴민트들에게서 어떤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 자신도 시스템에 종속되어 도구로써 존재하는, 또 하나의 휴민트이기 때문에.
조직의 명령은 명확했다. 북한의 마약 공급 루트를 파악하는 것. 우리가 AI에게 쿼리(Query)를 던지듯, 조직은 블랙 요원들에게 임무를 투입한다. 요청자는 처리 과정을 알 수 없다. 현지에서 요원들이 어떤 경로로 정보를 수집하고, 어떤 인간과 접촉하며, 어떤 위험 앞에 노출되는지 — 조직의 눈에는 블랙박스다. 입력(명령)과 출력(보고)만이 가시적일 뿐, 그 사이의 모든 것은 어둠 속에 봉인된다.
밤은 그 봉인의 물리적 조건이다. 요원들이 움직이는 시간대는 주로 밤이다. 밤은 단순한 시간적 배경이 아니라, 불투명성을 보장하는 환경적 도구다. AI의 블랙박스가 내부 처리 과정을 감추듯, 밤은 요원들의 활동을 감춘다.
그런데 블랙 요원들은 휴민트 운용에 실패하며 조직의 요청에 충분하지 못한 응답을 내어 놓는다. AI가 불충분한 답변을 생성하듯, 요원들의 보고는 임무의 목표에 닿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 실패의 서사 위에 전혀 다른 장면을 올려놓는다. 러시아 갱단을 소탕하는 통쾌한 시퀀스. 블랙박스 안에서 펼쳐지는, 조직의 쿼리와는 무관한 이 장면들은 — 어쩌면 처음부터 '환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관객은 안다. '뭐야, 결국 꿈이었어?'라는 허탈함이 어떤 것인지. 반전 이후의 그 익숙한 공허함을. 그런데 감독은 이 관습적인 허탈감에 시대의 흐름에 어울리는 그만의 언어를 부여한다. 단순히 '꿈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AI의 환각(Hallucination)과 같은 판타지였다고, 조직의 쿼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블랙박스가 생성해 낸, 그럴듯하지만 근거 없는 응답이었다고. 요원들의 인간다움, 그들의 짧은 연대, 그 모든 것이 — 블랙박스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환각으로 수렴한다.
관객이라는 'Human Intelligence'는 그렇게 환각을 경험한다.
모호하다 느꼈던 빛의 스펙트럼은 최면을 위한 도구였을까? 조 과장은, 그걸 활용해 우리를 그의 꿈속으로 끌어들였나? 영악한 조 과장 안에 영리한 감독이 들어앉았다. 감독의 이 비밀스러운 공작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다시 극장으로 불러들인다.
공각기동대에 인형사가 있었다면, 휴민트에는 최면술사가 있다.
조 과장은 김수린의 팔에 직접 센서 링을 채운다. 신체 리듬을 전송하기 위한 도구다.
그 팔에는 자해 흔적이 많다. 센서 링은 그 자국들 사이에 조용히 놓인다. 시스템이 몸에 새기는 기술적 표식이, 이미 많은 것을 담아 온 팔 위에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다. 김수린은 결국 살아남지 못한다.
영화에서 묘사된 조 과장과 채선화의 두 번째 만남에서 같은 도구가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채선화가 스스로 자신의 팔에 센서 링을 채운다.
물건은 같다. 달라진 것은 누가 채우느냐다. 그리고 화면에 잡히는 채선화의 심박수는 불안정하다. 불규칙하게 요동치는 수치. 하지만 오히려 강한 생존 욕구나 극 중 생존 가능을 암시한다. 시스템이 몸을 감시하기 위해 설계한 도구가, 이번에는 살아 있음을 증언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채선화의 주체성이 발휘되는 순간.
그런데 영화는 이 해석을 허락하기 전에 다른 가능성을 슬쩍 흘려보낸다. 조 과장의 현지 동료 임 대리는 채선화가 북측 요원일 수 있다고 짚는다. 단 한 번, 지나치듯. 영화는 그것을 확정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
그러나 그 한 마디가 이 장면 전체를 다시 읽게 만든다.
채선화가 고도로 훈련된 요원이라면 — 마약 유통망에 깊숙이 침투하기 위해 오랜 시간 신분을 유지해 온 인물이라면 — 센서 링을 스스로 채우는 행동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주체성의 회복이 아니라, 처음부터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는 자가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 불안정한 심박수도 취약함이 아니라 작전 중의 긴장으로 읽힌다.
그리고 그 독해가 맞다면, 영화 전반에 걸쳐 채선화를 향해 흘렀던 감정들이 일제히 재검토된다. 박건이 목숨을 건 순애보, 조 과장이 느끼는 죄책감과 책임감, 그리고 스크린 앞에서 그를 걱정하던 관객의 연민까지 — 전부 훈련된 요원이 구축한 맥락 위에서 작동한 감정이 된다.
쉘은 본격적인 총격신을 지나면서 의미가 달라졌고, 펜은 누가 쥐느냐에 따라 폭력과 선택이 갈렸다. 그런데 채선화가 요원이라면,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도구"는 소품이 아니라 인물 그 자체다. 류승완은 도구화의 논리를 물건에서 시작해 결국 인간에게로 밀어붙인다. 그것도 관객이 가장 감정 이입한 인물에게.
영화는 끝내 답을 주지 않는다. 채선화가 무엇이었는지를. 그 모호함이 불친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의 핵심일 수 있다. 시스템 안에서 우리는 상대방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앎 위에서 내린 선택들이, 사실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가.
〈부당거래〉에서 류승완은 반전을 돌려줬다. 최철기가 편의를 위해 임의로 지목한 가짜 범인이, 사후에 진범으로 밝혀지는 구조. 시스템이 만들어낸 거짓이 우연히 진실과 일치하는, 잔인하고 명확한 아이러니. 관객은 "아, 그랬구나"로 정리할 수 있었다.
〈휴민트〉는 그 정리를 주지 않는다. 채선화가 무엇이었는지 끝내 확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모호함이 서사의 빈틈이 아닐 수 있다. 분단이라는 현실에서 한 사람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시스템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 두 가지가 모순이 아닌 세계가 존재한다. 채선화의 불확실성은 그 세계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조 과장의 첫 신은 두 번의 스위칭으로 시작된다.
침대 옆 전등을 켠다. 잠에서 깨어나는 인간으로서의 조 과장. 그리고 책상 위 전등을 켠다. 작전을 시작하는 요원으로서의 조 과장. 하나의 몸 안에 공존하는 두 개의 존재가, 두 번의 스위칭으로 순서대로 켜진다.
영화 마지막에서 그는 다시 비슷한 구조의 방에 있다. 이번에는 전등을 끄며 침대에 눕는다. 켜는 것이 시작이었다면, 끄는 것은 종료다. 하지만 이 종료는 죽음이 아니다. 그냥 하루가 끝나는 것이다. 그 평범함이, 이 영화에서 가장 조용한 반전이다.
이 장면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도시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
〈베를린〉(2013)의 마지막 대사는 “블라디보스토크. 원웨이”다. 공화국의 영웅이었던 북한 요원 표종성이 베를린 중앙역에서 편도 티켓을 사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난다. 그가 향한 곳이 블라디보스토크였다. 그리고 〈휴민트〉에서 황치성은 박건에게 담담하게 말한다. 표종성은 지금 이곳 차가운 물 밑에 있다고.
베를린의 마지막 장면과 휴민트의 첫 장면은 같은 도시에서 이어진다. 표종성이 도착했다가 수장된 그 도시에서, 조 과장이 전등을 켜고 일어난다. 표종성의 스위치가 꺼진 자리에서 조 과장의 스위치가 켜지는 것이다.
류승완은 이 연결을 설명하지 않는다. 황치성의 대사 한 줄로 흘려보낸다. 그러나 그 한 줄이 첫 신의 전등 두 개를 전혀 다른 무게로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기상 장면이 아니다. 시스템에 맞서다 끝난 사람이 있던 도시에서, 다른 사람이 불을 켜고 다시 시작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 조 과장은 살아서 불을 끈다. 표종성이 끝난 도시에서, 조 과장은 하루를 마치고 눕는다. 죽지 않았다. 이것이 류승완이 〈부당거래〉에서 〈베를린〉을 거쳐 〈휴민트〉까지 오면서 건네는 가장 조심스러운 답일 수 있다. 시스템 안에서 버티면, 어떤 날은 그냥 불 끄고 눕는 것으로 끝난다고.
쉘은 영화 후반부 총격신에서 의미가 달라졌다. 펜은 쥔 손이 달라지면서 폭력과 선택 사이를 오갔다. 센서 링은 채우는 자와 채워지는 자가 달라지면서 감시와 생존 사이를 전환했다. 그리고 전등 스위치는 켜고 끄는 행위 자체가 한 인간의 시작과 종료를 만들어냈다. 이 영화에서 도구는 그저 의미 없이 거기 있지 않았다. 누가, 언제, 어떤 맥락에서 쓰느냐가 의미를 결정했다.
스위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스위치는 소품이 아닐 수 있다. 관람 전의 관객과 관람 후의 관객은 다른 사람이다. 채선화를 어떻게 보는지, 시스템을 어떻게 보는지가 바뀌어 있을 수 있다. 영화는 스크린 안에서 스위칭의 문법을 반복하면서, 동시에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도 같은 동작을 수행한다. 〈휴민트〉는 맥락의 전환을 다루는 영화이면서, 그 자체로 관객에게 맥락의 전환을 일으키는 도구다.
맥거핀인가, 다음편을 위한 씨앗인가.
영화 안에서 표종성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황치성의 입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 “베를린에서 공화국 영웅이었던 표종성 — 지금은 여기 차가운 물 밑에 있어.” 황치성이 막 파견된 박건에게 건네는 이 문장은 자기소개이자 경고이며, 무엇보다 하나의 치적이다. 죽은 자의 이름이 살아 있는 자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박건은 그 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자신이 아는 것과 다르다고. 그건 표종성의 생사 여부보다 황치성의 이야기 중 어느 부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보위성 요원인 박건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 경로에서, 표종성의 죽음은 확인된 사실이 아닐 수 있다. 황치성이 거짓 치적을 쌓는 인물이라는 사실은 영화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입증된다 — 체제를 이용하되 체제를 믿지 않는 자, 펜으로 기록을 남기는 대신 존재를 지우는 자. 그런 인물이 표종성의 죽음을 자기 공으로 가져갔다면, 그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근거는 없다.
물론 이것은 가설이다. 영화는 어느 쪽도 확정하지 않는다. 박건이 죽음을 앞두고 조 과장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마지막 장면 — 관객에게 들리지 않는 그 말 — 이 표종성과 연결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빈칸은 빈칸으로 남는다. 다만 류승완이 〈베를린〉의 열린 결말을 13년 뒤 〈휴민트〉에서 황치성의 입으로 건드렸다는 사실만큼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분단이라는 조건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이 세계관의 지층은 계속 쌓인다. 표종성이 맥거핀인지, 다음 이야기를 위한 씨앗인지는 — 아직 류승완만이 알고 있다.
도구는 중립적이지 않다,
누가 어떤 맥락에서 쓰느냐가 의미를 결정한다
죽음을 앞에 둔 박건의 말은 관객에게 영원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진다. 그걸 전달받은 조 과장 속에서 맥락의 전환이나 변조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살고 싶은 건 조 과장 본인이고, 채선화를 일본으로 망명시키려는 결정이 오히려 박건에게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조 과장은 박건의 유언을 실행하듯 채선화에게 일본으로의 망명을 제안하지만 채선화는 거절한다. 조 과장의 제안이 박건에게서 나온 것이 맞다면, 박건과 채선화가 다시 한번 엇갈리는 지점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채선화가 곤란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계획을 세운 건 항상 박건이었다 — 다트 핀을 날리듯 신중하지만 상대의 동의를 묻지 않는 일방적인 결정. 조 과장은 이미 의미가 사라진 박건의 말을 그대로 전달하는 대신 임 대리와 관객에게 거짓을 이야기했을 수도 있다. AI와 다르게, 인간은 일부러 거짓을 말할 수 있다.
선화를 일본으로 망명시켜 주시오,
대사관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 그를 찾아가시오
적어도 나는, 박건을 이렇게 기억하고 싶다.
AI 정보
〈휴민트〉에는 세 개의 레이어가 겹쳐 있다. 첫 번째는 체제의 레이어. 국정원과 보위성이라는 두 시스템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충돌한다. 두 번째는 감정의 레이어. 박건과 채선화의 관계, 그리고 조 과장이 정보원에게 느끼는 죄책감이 만드는 인간적 온도. 세 번째는 도구화의 레이어. 사람도 물건도 기능으로만 정의되는 이 세계의 논리.
이 세 레이어가 채선화 한 인물에게 동시에 작동한다. 체제와 체제의 접점에 있고, 감정 서사의 중심에 있고, 가장 노골적으로 도구로 취급된다. 세 원이 겹치는 벤 다이어그램의 정중앙. 그 교차점에 놓인 인물들 간의 서사는 매우 압축된 형태로 영화를 이끌어 가는 도구로 쓰인다. 타격감 넘치는 액션과 악당이 서포트해 주는 로맨스는 무거운 주제를 희석하기 위한 도구로서 충분해 보인다.
악역 황치성에게는 펜이 하나 있다. 그는 그 펜으로 고문을 한다.
펜은 원래 기록하고 서명하는 도구다. 공식적인 권력의 언어. 황치성은 그것을 신체에 쓴다. 원래의 용도가 있는 물건을 다른 목적으로 전용하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 자연스럽다.
황치성은 북측 시스템 안에 있으면서도 그 시스템을 경멸한다. 체제를 믿어서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해서 이익을 챙기는 인물. 시스템의 대리인이 아니라 기생자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도구로 쓰는 방식에서는 황치성이 가장 거리낌이 없다. 믿음이 없으니 윤리적 제동도 없다. 체제를 가장 냉소하는 인물이 가장 체제적으로 행동하는 역설이다.
영화 말미, 조 과장이 채선화에게 펜을 내민다. 일본 망명을 위한 서류에 사인을 받기 위해 제공된다. 황치성의 펜과 거의 같아 보이는 물건이다. 황치성의 펜은 거부할 수 없었다. 조 과장의 펜은 채선화가 거부한다. 서명 대신 다른 선택을 한다.
이 대칭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채선화의 서사를 완성한다. 도구로 취급받던 인물이 도구의 사용을 스스로 거절하는 순간. 황치성의 펜이 타인에 의해 강제로 쓰이는 폭력이었다면, 조 과장의 펜은 건네는 선택지였다. 채선화는 그 선택지조차 자신의 방식으로 거절함으로써, 처음으로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다.
류승완 감독은 오랫동안 같은 질문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시스템 안에서 인간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부당거래〉는 가장 어두운 답이었다. 선택들이 누적될수록 인간이 작아졌다. 〈베를린〉에서는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난 인물이 그 끝에서 가장 인간적인 선택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엔딩은 희망인지 비극인지 열려 있었다.
〈휴민트〉는 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한다. 이번에는 시스템 바깥이 아니라 한복판에서 버티는 이야기다. 조 과장은 국정원 안에 있고, 박건은 보위성 안에 있다. 그 안에서 선택하고, 그 선택이 힘을 얻는다. 시스템은 여전히 모든 것을 도구화하지만, 그 한복판에서 인간이 버티고 있다. 부당거래에서 베를린을 거쳐 휴민트까지, 감독의 답이 조금씩 낙관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류승완 감독의 칸과의 인연은 2005년에 시작됐다. 〈주먹이 운다〉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받았고, 2024년 〈베테랑 2〉가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에 초청되었다. 칸의 공식 수상자 명단에 류승완 감독의 이름은 아직 없다. 〈휴민트〉는 그 빈칸을 의식하고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 투명한 쉘, 두 자루의 펜,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은 유언 — 같은 매개가 장면마다 다른 의미로 작동하는 이 각본의 구조는, 칸이 반복적으로 상을 수여해 온 작품들의 언어와 겹친다. 이창동 감독이 〈시〉로 각본상을 받은 것도 언어가 의미를 운반하는 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접근에서라면, 칸이 각본을 볼 때 찾아온 것을, 이 영화는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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