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축소된 형태를 종이에 출력했다면요
To. A
안녕하세요, 이혜지입니다. 연휴에는 꼭 책 한 권 읽어야지 생각했던 참에 당신께 영감을 얻어 그 목표가 뚜렷해졌습니다. 10월을 맞아 습관적으로 메모하게 된 것은 바로 교수자가 언급하는 도서였습니다. 책을 선별해서 읽을 수밖에 없다면 최대한 보증된 작품을 골라내는 게 좋겠다는 개인적인 기준을 세우기도 했으니까요. 그것이 제가 고전에 대한 추상적인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저는 당신께서 언급한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과 움베르토 에코의 『미네르바 성냥갑』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대성당』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후의 잔상은 취향이 아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책에 수록된 단편을 전부 빼놓지 않고 읽었던 까닭은 읽다 보니 흡입력 있는 이야기도 숨겨져 있었더라는 하찮은 이유 그뿐입니다. 여러 단편에 술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표현상으로는 속담, 격언을 비롯해 ‘첩첩산중’, ‘학수고대’같은 사자성어가 문득문득 보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저자의 문체인지 번역자의 몫인지는 완전히 기억하진 못합니다. 향수를 부르는 어휘는 해외 문학을 읽고 있다는 격차를 대폭 줄여주었습니다.
어쨌든 그녀와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가 괜찮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혹시 뭔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나는 알고 싶지 않다.
p. 197
또한, 『대성당』으로 묶인 이 단편집은 어긋난 가족, 연인 등 일상적인 소재에 거침없이 착안하여 평범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일상을 뽑아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사건을 둘러싼 인물 군상들이 특별하지 않아 지루한 눈알 굴리기의 연속입니다. 다시 바꿔 말하면, 세계 문학전집에 수록된 책들은 대개 읽기 전 자세를 갖추고 첫 장을 마주해야 하는데, 이 책은 그럴 것 없이 비교적 용이하게 읽히는 편이었습니다. 여러 감상이 제게 주어졌어도 결국 평이한 논점에서 오는 무료함은 떨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중간 지점에서 자극적인 삽화를 발견한 후 흥미 발굴 레이더가 탁하고 켜진 것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쾌락적인 인간이었나 대뜸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가족의 서사를 다룬 작품보다는 연인 간의 희로애락을 담은 스토리에 말초적인 관심이 가는 수밖에 없더군요. 혹자는 작가가 하나의 화두로 평생을 이야기한다고 말합니다. '대성당'이라는 제목도 작가에게 그런 의미였을까 혼자 되뇌어 봅니다. 어떤 단어가 작품 어딘가에서 따온 하나의 수확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작가에게 너무나 중요해서 바로 그 단어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창조해 내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이제 앞으로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각자 상대방 없이 할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순간 그 무엇보다도 슬픈 일처럼
그에게 느껴졌다.
p. 255
책을 음미하여 얻은 통찰이 있어야지 그저 이틀간 눈알만 굴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겠죠. 작가는 무얼 말하고자 여러 편의 소설을 쓰고 한데 묶어 『대성당』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을까요. 다른 작품에서 쉬이 접하듯 작가 또한 일상의 균열과 그로 인해 유구했던 의미들이 퇴색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제시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사람에 대한 단순한 기술일지도요. 이게 다 사람 사는 일이라고, 다 이렇게 살아가고 살아진다는 인류의 축소된 형태를 종이에 복사해 출력했다면요. 실제로 단편에 소비된 가난, 실직, 이혼, 불륜, 중독 등의 카테고리는 아직도 현대 사회 분열의 주범이며 연거푸 흑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작가에게는 평범함이 그저 하나의 화두였을까요. 그는 보통의 날들을 첨예한 시선으로 기록했을 뿐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2023년 10월 16일 (월) 오후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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