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와우, 사부 그리고 레벨업

레벨업할 준비되셨습니까?

by 티라노

프롤로그: 와우, 사부 그리고 레벨업




문제는 플레이어야.


나는 한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라 한다)라는 게임에 몰두해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2006년부터 2007년, 친구의 꼬드김으로 와우 불타는 성전을 가볍게 시작했다가 푹 빠져 버리고 말았다. 잠도 줄이고, 밥도 대충 먹어가며 하루에 16시간씩 게임을 했다. 그런데 게임에 대한 열정이 무색할 만큼, 내 게임 실력은 형편없었다. 남들이 어렵지 않다고 하는 쉬운 캐릭터만 골라서 했음에도 (늦게 시작한 주제에) 레벨업도 느리고, 배움도 느린 이른바 민폐 캐릭터였다. 같이 게임하던 친구가 보다 못해서 '야, 너 다른 아이디로 다른 서버 가서 좀 놀다 와라, 연습도 좀 하고. 네 캐릭터 내가 좀 길러놓을게.' 하고 레벨업을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해서 냉큼 수락했다. 나도 친구들과 같은 지역에서 폼나게 놀아보고 싶었는데 레벨업이 너무 느려서 답답하던 참이었다. 며칠 뒤 내 아이디로 접속해보니 초라한 내 캐릭터가 달라져 있었다. 생각보다 더 많이. 레벨이 훅 상승해 있었고, 보라색(당시엔 보라색 아이템이 일반 유저들이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아이템이었다!) 아이템들로 둘둘 말려 있었다. 게다가 수중의 돈까지 늘어나 있었다. '플레이어가 달라지면, 캐릭터가 이렇게 바뀌는구나'를 통감한 순간이었다.





멘토 오사부, 인생 공략집을 읽어주다.


인생도 게임과 비슷하다. 플레이어가 문제다. 나는 좋은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내게 인생은 견뎌내야 하는,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힘겨운 어떤 것이었다. (남들은 좋은 시절이라고 말하는) 유년시절,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온통 무채색으로 점철되어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캐릭터의 문제인 줄 알았다. 내가 타고난 것들, 내 가족, 외모, 지능, 운동능력 같은 요인들(이후 '설정값'이라고 표현할 것이다)이 나의 인생을 불행하게 결정지어 놓은 것만 같았다. 세상은 그리고 내 운명은 내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었고, 마음속에는 분노, 의기소침함, 질투 등등의 탁한 감정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를 반복했다. 레벨업은 느렸고, 팀원들의 발목을 잡기도 하는 즐거움과 여유가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20대 초반, 오사부를 만나기 전까지의 얘기다.


취미로 노래 좀 배워보겠다고 보컬 트레이닝 레슨을 받으러 갔다가 오사부를 만났다. 그런데 보컬 레슨은 한 두 달 정도밖에 받지 않았다. 대신 오사부를 만나 내 신세를 한탄하고 고민을 늘어놓다가 사부에게 혼나는(?) 딱히 무엇이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대화들이었다. "사부, 저 이직할까 봐요. 팀장은 맨날 책임 회피나 하려고 하고, 내가 하는 일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훈수나 두려고 해요" "원래 회사는 그래, 회사는 회사를 위해 있는 거지, 널 위해 있는 게 아냐. 회사를 옮긴다면 지금 있는 불만은 해결될 수도 있지만, 다른 고민이 또 생겨나겠지. 지금 고민해야 하는 건 네가 너만의 경쟁력을 갖추었냐는 거야. 그러면 모셔가려고 하겠지. 지금은... 아니잖아?" [...] "사부, 저 나이도 찼고, 결혼은 해야 될 것 같은데, 확신이 안 서요." "지금 고민하는 건, 네가 나이가 들면 결혼상대로서의 너의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어. 나이가 들수록 선택지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너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도, 또 그렇기 때문에 지금 결정해야겠다는 것도 틀린 생각이지. 결혼상대를 결정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너를 정말 사랑하느냐, 널 위해 인생에서 주는 여러 가지 시련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지. 그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그건 아닌 거야." 등등.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부와 일상적으로 나누었던 대화들이 바로 멘토링이었다. 매우 값진 즉문즉설 강의를 사부를 계속 따라다니며 공짜로 제공받은 셈이다. 이상하게도 사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오면, 삶의 문제들이 하나씩 해결되었다. 가족 간의 불화, 진로 문제, 연애 문제, 대인관계 같은 내 삶의 다양한 방면의 문제들이, 정말 신기하게도 내 삶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했던 사부와의 대화를 통해 풀려 나갔다. 사부가 하나님도 아니고 외적인 환경을 바꿔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플레이어로서 어떻게 인생게임을 해야 하는지를 여러 번, 여러 가지 버전으로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공략집을 보고, 지도를 보고 한 번에 이해를 못하니까, 옆에서 "지금이야, 뛰어." 또는 "여기서는 눈망루 설원으로 가는 게 좋아" 같은 세부적인 지침을 주기도 하고, "자, 지금 너는 눈에 안보이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지형은 이래." 하고 지도를 보여주기도 하는 방식으로 열등생에게 나머지 공부지도를 해줬다. 플레이어의 실력이 느니까, 환경이 동일해도 나의 세계는 분명히, 확연하게 변화했다.




오, 이 게임, 하다 보니까 진짜 대박이예요.


1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 내가 엄청난 성장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의 나는 욕심은 많고, 갖고 있는 것에는 만족하지 못해서 스스로를 괴롭혔고, 살아남으려면 무언가를 더 해내야 한다는 묘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가진 것은 모두 하찮아 보여서, 새로운 사람, 새로운 물건, 새로운 기회, 새로운 삶을 욕심냈다. 내가 부족하니까, 내가 불행하니까, 못난 짓을 해도 다른 사람들은 나를 이해해 주어야 한다는 이상한 권리의식도 생겨났었다.


그런데 지금 살펴보니, 나는 지금 소생해 있다. 인생의 룰을 불평하기보다는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내가 욕망하는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현명하게 목표를 설정해서 성취할 줄 알게 되었다.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볼 여유를 찾았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들을 충분히 맛볼 수 있을 만큼 감각이 예민해졌다. 예전에는 어렵고 큰 숙제처럼 느껴졌던 것들, 예를 들면 직업을 갖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들을 쉽게 풀어내고, 또 그 과정을 누릴 수도 있게 되었다. 20대 때 바라본 나의 30대는 어둡고, 정신없고, 소진되어 가는 모양이었는데, 막상 내가 맞이한 30대의 하루는 좀 피곤하긴 하지만 20대보다도 영롱하고, 맑다. 플레이어의 실력이 바뀌니, 게임에서 얻는 게 훨씬 많아졌다. 당연히 게임을 하는 것이 더 즐거워졌다.



명강의 듣고 온 열등생 노트, 빌려드립니다.


지금부터 나눌 내용은 이른바 "열등생 노트"다. 명강의를 열심히 듣고 온 열등생이다. 아마 그래서 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묘한 자신감이 있다. 나는 서울대 출신, 수석, 이렇게 타이틀이 화려한 선생님을 선호하지 않는다. 척하면 척,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치는 사람들이 나처럼 두 번 세 번 알려줘도 이해를 못하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처음보다 많이 성장한, 해당 분야의 일을 잘 못했다가 잘하게 된 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좋은 전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부의 가르침에서 정수만 뽑으면 분량이 그렇게 많지 않다. 특히 내가 이해하고 적용한 것만 따지면 더 적다. 하지만 나는 맨날 혼나고, 깨지고, 고민해 보고, 적용하면서 시행착오를 하는데 10년이 걸렸다. 사부와 사부의 제자들과 함께 마신 커피만 족히 백 잔이 넘는다. 1년에 평균 10번 이상씩은 봤고, 보통 3시간에서 10시간가량은 얘기했으니 500시간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지도를 받은 셈이다. 나는 공부도 못하면서, 고집 세고, 일단 개기고 보고, 예외를 찾고, '만약 해도 안되면요, 그땐 어떡해요!'를 여러 번 물어보는, 손이 많이 가는 놈이어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래서 쉬운 것도 망설여 보고, 헷갈려 봤기 때문에 내가 고민한 내용도 나누는 것이 나처럼 고민 많고 의심 많은 청춘들에게 유의미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괜히 숨은 명강의를 공연히 오픈스페이스에 공개했다가 가뜩이나 바쁜 사부를 더 못 보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글을 쓴다는 것 자체에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하지만, 일단 써보기로 했다. 이 글은 학창 시절, 대학교 시절의 나처럼 인생 사는데 서툴러서 괴롭고 외로운 친구들에게 바치는 글이다. 오락가락 길 위를 바쁘게 오간 내 발자취, 사부와 나누었던 대화들, 그리고 사부의 다른 제자들인 M2 멤버들의 인터뷰를 함께 실었다. 그리고 멘토링을 할 때 큰 도움을 받았던 성장툴인 3P 바인더의 나름의 작성법도 함께 실었다. 모쪼록 부족하지만 힘든 오늘을 보내고 있었던 누구 한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고, 어떤 방황하는 젊은이 한 명에게는 삶의 힌트를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미지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347&aid=0000030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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