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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Nov 16. 2021

그까짓 가방

내 인생에서 가장 슬픈 날

아빠는 회사를 다니고 엄마는 오랜 기간 가정주부를 하셨다. 정확한 금액은 몰랐지만 버는 돈의 상당한 액수를 우리를 위해 사용한다는 것쯤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학원은 절대 빠지지 않았고, 고가의 물건을 갖고 싶다고 조르는 아이가 아니었다. 가기 싫어도 가고, 갖고 싶어도 참는 그런 마음들이 스스로를 억제하고 절제하는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 습관은 어떤 일을 시작하면 꾸준히 하는 장점으로도, 웬만한 일은 참고 견디어 내며 흥청망청 돈을 쓰지 않는 내가 되는 동시에, 결핍으로 자리 잡았다.


눈앞에 놓인 선택을 할 때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어중문학을 복수 전공하고 교환학생을 다녀온 뒤 외국 생활의 로망이 생겼다. 진로도 고민이었지만 역시 현실적인 문제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최선의 선택은 해외 인턴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상하이의 한 공관에서 6개월간 인턴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끝날 무렵에도 여전히 진로가 불확실했던 나는 비자와 돈 문제가 남은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입국을 택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취업 준비를 하며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싶지 않았기에 바로 취직을 했다. 중간에 몇 번의 고비는 있었지만 한 번 취직한 직장에서는 출근의 굴레에 갇혀 6개월이 어느새 1년이 되고 곧이어 4년에 이르렀다. 기간이 쌓인 만큼 나를 이루고 있던 주변 상황도 평탄했다. 일도, 관계에 있어서도 문제를 일으키거나 새롭게 적응해야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도 제일 안정적인 시기였기에 일정 범위 내에서의 소비는 여유로웠다.


마침 생일이 다가올 때였기에 엄마와 함께 백화점으로 쇼핑에 나섰다. 전부터 고민하던 가방이 있었고, 생일이기에 내심 기대를 했다. 이미 사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도 했고 상품권을 사용하고 할인을 받으면 괜찮은 가격이었다. 그런데 함께 간 엄마의 반응은 나의 기대와는 달랐다. 바로 구매할 줄 알았는데 “굳이 저 가방을 사야 할까”, “조금 비싸지 않니”라며 망설이는 엄마에게 배신감이 몰려왔다. ‘이 정도는 과한 소비도 아닌데’, ‘내 생일 선물을 사러 온 거면서’, ‘다른 친구들은 엄마 찬스로 더한 것도 사는데 이 가방이 얼마나 한다고’. 가방을 사려는 의지도 사라지고 맥이 풀려버려서 더 볼 것 없이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탔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갈 때, 그래서 예상치 못한 감정이 올라올 때의 당황스러움은 눈물로 나타나곤 한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눈곱을 떼는 척 손을 몇 번 가져다 대었고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정류장 몇 개를 지나치고 엄마는 다정스러운 말투로 “그 가방 사고 싶어? 사고 싶으면 사자”라고 말했지만 이미 가방이고 뭐고 다 쓸데없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물어보는 엄마 앞에서 난 다시 9살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까짓 가방 하나로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 유연하게 넘기지 못하고 속이 상해하는 나를 보면서.


집에 도착해서도 방 안에 들어간 나에게 엄마는 괜히 말을 걸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면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기분을 모를 리 없는 엄마의 마음까지 신경이 쓰여서, 이런 나를 더 들키고 싶지 않아서 한동안 방에서 나올 수 없었다.


분명히 “그까짓 가방”일 뿐인데 그날 오후 내내 나를 흔들었다. 가방으로 별의별 생각을 하는 내가 정상인가 싶다가도 ‘그래 난 이런 사람이야’라고 마무리를 지어 버린다. 나만 생각하고 살아왔던 시간과 그녀의 삶이 비교가 돼서, 선택의 기준이 본인이 아니라 우리였을 시간 속의 그녀의 삶이 보여서였다. 어쩌면 나는 홀로 소설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록달록한 색 사이에서 괜히 검정 동그라미를 파헤쳐 집중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검정 동그라미는 피하고 싶어도 피하려고 해도 한 번씩 등장해서 나를 흔들 걸 안다. 이 감정을 멈출 수 있는 순간은 어쩌면 말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그까짓”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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