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갈색 가죽 다이어리

by 버들


나의 생각하는 소비생활 : <사고재비>

17. 갈색 가죽 다이어리

미루지 않고 자발적으로 쓴 최초의 일기장은 자물쇠를 거는 일기장이었다. 옆반에 좋아하던 친구의 이야기를 주로 적었다. 그 친구에게 문구점에서 산 장난감 반지를 선물했는데 새끼손가락에도 안 맞아서 슬펐다는 이야기도 적었다. 초등학생의 마음에 담아두기에는 버거웠던 설렘을 자물쇠에 의존하여 가감 없이 기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옷핀으로도 쉽게 열리는 일기장의 허술함을 발견했고, 엄마도 몰래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말았다. 자물쇠가 쉽게 열린 흔적을 발견한 다음 날은 고개를 숙인 채 아침밥을 먹었다.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옷장 깊숙이 숨겨둔 그 일기장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좋아하는 아이돌의 잡지 사진을 덕지덕지 붙인 덕질 전용 일기장을 썼다. 밀려오는 과제를 쳐내기에 바빴던 대학생 시절에는 튼튼한 양장 다이어리에 먼슬리, 위클리 스케줄을 빼곡히 채웠다. 자물쇠 일기장은 사라졌지만 그 뒤로 쓴 일기장들은 본가와 내 집 어딘가 나도 찾기 힘든 구석에서 유물처럼 존재하고 있다.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낯간지러워 10초 이상 들여다보기 힘든 일기를 계속 기록하는 이유가 뭘까.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나만 볼 수 있는 종이에 두서없이 쏟아낸다. 그걸 들여다보고 있으면 앞뒤 사방으로 돌려가며 생각하느라 버거웠던 문제가 객관화되어 납작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속 무거운 짐의 존재를 친구에게 털어놓았을 때와는 또 다른 평온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써 내려간 날 것의 마음이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숙성이 되면 그림으로 남긴다. 일기에서 그림으로 가는 흐름이 이어져있으니 내가 일기를 쓰는 일은 필연적인 것이다.

요즘 쓰고 있는 것은 몇 해 전에 큰 마음먹고 산 두터운 가죽 다이어리. 손 때가 묻을수록 매력이 빛나는 가죽 커버에 속지만 원하는 타입으로 바꿔서 오래오래 사용이 가능하다. 나는 TO DO LIST와 무지 노트를 사용하고 있다. 오전/오후/유선으로 나누어져 있는 TO DO LIST의 맨 아래 유선 부분에 자기 전 그 날의 감사한 일 세 가지를 적는다.

얼마 전 감기로 고생하던 날의 페이지를 찾아보니 이렇게 적혀 있다.

‘바쁜 거 끝나고 아파서 다행이니 상황에 감사합니다.’
‘아파도 바로 병원에 갈 수 있는 환경에 감사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가만히 두면 나태해지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머릿속이 소란한 우주 같은 나는 더하겠지. 끊임없이 돌봐야 중간은 갈터이니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에 대한 기록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흘러가는 생각 중 쓸 만한 놈은 붙들어 종이에 끄적이고 싶다. 오늘의 할 일을 적어 눈으로 확인하고 하나하나 실행에 옮길 때마다 색연필로 밑줄 긋는 행동에서 오는 성취감은 소중하다. 이 글을 써 내려가며 마음을 되짚어 보니 내가 다이어리를 쓰는 일은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에 대한 저항이라는 결론이 났다. 하루를 기록함으로써 이 삶을 내 나름의 방식대로 꾸려나가고 있다는 실감을 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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