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평소보다 조금 더 외로운 날이었다. 퇴근길, 연우는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북카페에 들렀다.
북카페는 연우가 우울하거나 생각이 많이 필요한 날이면 종종 들르는 곳이었다. 조용한 음악, 따뜻한 조명, 그리고 책 냄새가 가득한 공간은 연우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주곤 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치려던 순간, 옆자리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혹시 이 책, 재미있어요?”
낯선 목소리. 낯선 얼굴.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
연우는 책 표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또렷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말투는 조심스러웠고, 표정은 따뜻했다.
“아직 시작도 못 했어요. 그냥 제목이 좋아서요.”
연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그런 책 자주 골라요.
제목이 마음에 들면, 그냥 믿고 읽는 편이에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책 이야기에서 영화 이야기로,
혼자 사는 삶의 루틴으로, 그리고 ‘어쩌다 비혼’이라는 말까지 이어졌다.
그는 연우처럼 혼자 살고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도, 삶을 살아가는 방식도 연우와 닮아 있었다.
“가끔 외롭지만, 혼자라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더라고요.”
“맞아요. 그냥, 조금 더 조심스럽고 단단해지는 거죠.”
그날 연우는 오랜만에 누군가와 마음이 닿는 대화를 나눴다.
그는 연우의 외로움을 덜어주진 않았지만, 그 외로움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연우는 생각했다.
새로운 인연은 외로움을 없애주는 게 아니라, 그 외로움을 함께 바라봐주는 사람이면 충분하다.’ 도윤이가 가끔씩 생각이 날 거 같았다.
그의 이름은 도윤이었다.
연우보다 한 살 많았고, 출판사 프리랜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다.
결혼은 하지 않았고, 혼자 사는 삶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북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날 이후, 연우와 도윤은 가끔씩 책을 매개로 짧은 대화를 나눴다.
처음엔 서로의 취향을 묻는 정도였지만, 어느새 삶의 이야기까지 흘러나왔다.
“혼자 사는 게 외롭지 않냐고들 묻는데,
사실은 혼자 살아서 더 솔직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나를 꾸미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니까요.”
연우는 도윤과의 대화에서 처음으로 ‘비혼’이라는 단어가
부끄럽지 않게 느껴졌다. 그는 연우의 삶을 평가하지 않았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었다.
어느 날, 도윤은 연우에게 말했다.
“연우 씨는 자기 삶을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아요.
그게 참 보기 좋아요.”
그 말은 연우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다’고 말해준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연우는 집에 돌아와
현관에 놓인 아빠의 운동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혼자지만,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금 덜 외롭다.’
연우는 퇴근 후 도윤과 북카페에서 세 번째로 만났다.
두 사람은 책을 읽고, 가끔씩 짧은 대화를 나누며 조용한 오후를 함께 보냈다.
카페를 나서면서 도윤이 말했다.
“연우 씨는 전에도 말했듯이 혼자서도 잘 살아가는 사람 같아요. 그게 멋있어요.”
연우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가끔은 잘 살아내는 척일 수도 있어요. 근데, 그렇게라도 살아야 하니까요.”
그 말에 도윤은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 척이, 진짜가 될 때도 있어요.”
그날 밤, 연우는 집에 돌아와 현관에 놓인 운동화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자신이 오늘 신었던 구두가 가지런히 놓았다.
‘나는 혼자지만, 누군가와 나란히 걷는 상상을 해도 괜찮다.
어쩌다 비혼이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도윤과의 만남이 잦아질수록 연우의 마음은 복잡해졌다.
그는 편안했고, 따뜻했고, 연우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감정을 조용히 흔들었다. 연우는 도윤과 연인관계가 되기보다는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곁에서 격려하며 함께 동행해 주는 사람이길 바랐다.
하지만 도윤과 만나면 만날수록 어떤 감정들이 연우를 괴롭혔다.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고, 혼자서도 괜찮다고 믿어왔는데 도윤 앞에서의 자신은 낯설었다.
만약 연인 사이가 되어 짧고 단순한 연애로 끝나버린다면, 마음에 맞는 친구 하나를 잃게 될까 봐 그게 두려웠다.
그래서 도윤이 다가올수록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런 행동들을 눈치챘는지 도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연우 씨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가끔은 내가 불편한가 싶기도 해요.”
그 말에 연우는 당황했다.
불편하기보다는 그저, 익숙하지 않았을 뿐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는 일, 기대하고, 실망하고, 다시 기대하는 일. 그건 연우이게 오랫동안 접어둔 감정의 영역이었다.
그날 이후, 연우는 도윤과 조금 거리를 두었다. 도윤도 아무 말 없이 그 거리를 받아들였다.
연서는 집에서 혼자 앉아 생각했다.
‘나는 혼자 살아가는 데 익숙해졌지만, 누군가와 함께하는 데는 아직 서툴다. 어쩌다 비혼이지만, 어쩌다 사랑하게 될 수도 있는 거잖아.’
그 생각은 연우를 괴롭히기도 했지만, 동시에 위로가 되기도 했다.
서툰 감정도, 물러서는 마음도, 모두 연우의 진짜 모습이었다.
며칠간의 거리감 이후, 도윤과 북카페에서 다시 만났다. 도윤은 예전 보다 말이 적었고 연우 또한 그랬다.
서로의 거리감을 조심스럽게 확인한 듯한 분위기. 하지만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처럼 느껴졌다.
책을 덮고, 도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연우 씨는... 앞으로도 혼자 살고 싶어요?”
그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도윤의 눈빛엔 조심스러운 기대가 담겨 있었다.
연우는 잠시 생각했다.
그 질문은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던져왔던 것이기도 했다. 혼자 살아가는 삶,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삶.
“글쎄요. 혼자 살아 가는데 익숙해졌지만 그게 꼭 내가 원하는 전부는 아니에요.
다만, 누군가와 함께라면 내 삶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 참 좋네요. 지켜주는 사람. 그게 저도 되고 싶은 사람이에요.”
그 말에 연우는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불안이 아니라, 오랜만에 느껴 보는 따뜻함이었다.
가을이 깊어졌다.
연우는 북카페 창가에 앉아 도윤과 나란히 책을 읽고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그 침묵은 따뜻했다.
서로를 강요하지 않고, 서로의 속도를 존중하는 관계.
연우는 문득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이렇게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구나.’
도윤은 연우에게 연인이 되자고 말하지 않았다.
연우도 그에게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가끔은 격려하며, 조용히 동행하는 중이었다.
연우는 여전히 혼자 살고 있다.
현관엔 아빠의 운동화가 그대로 놓여 있었고, 냉장고엔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채워져 있었다.
혼자 살아가는 삶은 여전히 외로움과 함께였지만, 그 외로움은 이제 낯선 손님이 아니라 익숙한 동반자처럼 느껴졌다.
연우는 더 이상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을 작게 만들지 않았다.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하루를 채우고
자신이 지켜온 삶을 조금 더 단단하게 다듬어갈 뿐이었다.
창밖으로 바람이 불었다. 커피 향이 잔잔하게 퍼지고, 연우는 창가에 앉아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카페 밖 창문에서는 도윤이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