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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Feb 01. 2022

어느 인문학도의 고백 01

인문학(과 예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10년도 훌쩍 넘은 200x년, 어느 대학생이 있었다. 전공을 생각하면 원래 다니던 학교를 계속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미국의 Liberal Arts College 같이 다양한 단과대가 같이 있는 종합대학(은 핑계고 가고 싶었던 학교)에 가고 싶었던 그는 재수로도 모자랐는지 삼반수까지 해서 기어코 대학에 입학한다. 그렇게 겨우 겨우 입학한 대학은 지식의 천국이었다. 재미없는 수능 공부에서 드디어 벗어나 듣고 싶은 강의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곳. 어느 누구도 무엇을 공부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 곳. 어느 정도 정해진 길을 따라가던 여느 신입생과는 다르게 (토론과 발표를 빼고) 관심 있는 분야, 관심 있는 강의로 꽉꽉 채우기에도 학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태생적으로 자발적 아싸라 학과 생활도 안 하고 동아리도 안 들었던 그가 가장 좋아한 장소는 바로 도서관이었다. 방대한 장서에 깔려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그 학생은 도서관에서 교양 수업 참고자료를 찾던 중 같은 조였던 99학번 선배를 만났다. 훗날 그 선배는 그가 학번을 밝히자 놀라며 말했다. 신입생인 줄 몰랐다고. 신입생이 (입학하자마자) 도서관에 출몰할 리가 없기에...


그 학생이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공부가 좋았다기보다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것을 명확하게 알았기 때문이었다. 세계사와 제2외국어를 가장 좋아해 사탐 과목으로 꼭 세계사를 선택했던 그는 서양사학과와 불어불문학과라는 일생일대의 고민에 빠졌다. 나름대로 역사보단 외국어가 취업이 더 잘될 거라 결론 지어 불문과를 선택했지만 철학 빼고 문과 사는 두루두루 좋아했던 리얼 문과생이었다. 인문학이 좋았고 인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순진한 문돌이. 보통 문과에서 가장 높은 과는 취업이 잘 되거나 고시로 인생역전을 할 수 있는 실용학문인 (로스쿨 생기기 전) 법학과나 경영학과였다. 예나 지금이나 인문학의 위기는 일상의 언어였고, 문과대 학생은 거의 상경계 복수전공은 하나씩은 필수로 했던 그런 때였다. 그러나 그는 실용학문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실용학문 전공자를 무시하고 돈만 좇는 낭만이 없는 자로 매도했다. 한국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인 이유는 기초학문이 부실하고 인간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등교육을 받은 자이자 지식인이라면 기초학문을 해야 하고 공부 후 자신이 배운 것을 사회에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반드시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기에 인문학만이 그 목적에 딱 맞는 학문이었다. 당시 그는 소위 말하는 인문학 뽕에 제대로 취해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사랑하는 인문학이 크게 마음에 와닿았던 건 아니었다. 물론 재미는 있었지만 당최 인간 세상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마음에 와닿지가 않으니까. 연극 수업시간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으며 옆에 앉은 선배가 공감받고 위로받고 있는 동안, 그는 왜 이런 작품을 쓴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탔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전공 수업에서 그가 제일 재밌게 들었던 수업은 프랑스어 어휘 형태로 라틴어에서 영향받은 프랑스어 어휘 등을 배우는 프랑스어 역사 수업이었다. 어쩌면 그냥 프랑스가 좋아서 불문학과에 간 것이었는데 그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문학에서 의미를 찾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비록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그때의 그는 그 나름의 답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책에서 인문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이란 무엇인가 답을 찾기에는 그는 아직 어렸고 갈증의 방황은 있었지만 삶에서의 경험이 거의 없었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다. 바다 건너 해외에서까지 기나 긴 학생 신분을 막 벗어난 나는 얼마 전까지도 인문학 맹신자였다. 그러나 그 지독한 인문학주의가 깨진 건 다름 아닌 코로나와 백신 패스 때문이었다. 2020년 3월 봉쇄령 때부터 그 얼마 전까지, 사실 나는 코로나 때문에 불편함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 물론 봉쇄령 때문에 강제로 한국에 들어왔고 그 길로 프랑스에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한국에 강제로 오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것들, 겪지 못했던 것들이 나의 인생을 바꿔버렸기 때문에 한국 강제 입국은 나에게는 매우 유익한 일이었고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집순이인 나는 핑계 대며 합법적으로 집 밖에 안 나갈 수 있는 자가격리를 좋아했고 봉쇄령을 해서 사람 하나 없던 조용한 도시가 좋았다. 처음에는 마스크 쓰는 것이 싫었지만 얼굴을 가릴 수도 있고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는 마스크에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 QR 코드도 마찬가지고. 거리 두기를 핑계 삼아 회식하지 않는 것도 좋았고 그 핑계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되는 것도 다 좋았다. 처음 백신 패스가 시행되었을 때도 물론 전혀 좋지는 않았지만 술도 끊은데다 어차피 밖에서 놀지 않는 나는 유흥업소 등을 가지 않아도 상관 없었고 식당과 카페가 막혔을 때도 집에서 일하기 때문에 식당과 카페가 필수는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코로나 때문에 힘들어할 때도 나는 요리조리 피할 길들을 만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도 피해 갈 수 없는 순간을 맞닥뜨렸다. 바로 백신 패스가 도서관과 박물관을 덮쳤을 때였다. 그제야 처음으로 내 자유가 침해당한 것이 인식되었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깨어난 생각들은 멈출 줄을 몰랐다. 단순히 자유의 억압에 대한 분노와 부조리뿐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그리고 내가 쌓아왔던 기반이 흔들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연 내가 제대로 살아왔을까? 20대 초반의 내가 무시했던 실용학문은 코로나로 신음하는 세상을 구하고 있었다. 법조인들은 부당한 법에 맞서 싸우고 있었고, 의료인들은 현장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있었다. 경제인들은 기업을 일으켜 사람들을 고용하고 그 덕분에 사람들은 먹고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예술은? 그리고 문화유산은? 내가 그토록 부르 짖었던 문화유산의 보존과 복원이 지금과 같은 시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개인의 자유와 가치가 고통받고 있는 이때에 내가 사랑하던 학문들은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oem_by_Martin_Niemoeller_at_the_the_Holocaust_memorial_in_B

요즘 특히나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제목의 시를 인터넷에서 자주 볼 수가 있다. 코로나로 누군가는 이미 희생당하고 있었지만 나의 일이 아니라 나는 상관없었다. 그리고 도서관과 박물관을 덮쳤을 때, 드디어 나는 정신 차릴 수 있었는데, 내 자유의 수준은 문화생활의 제한 정도였을까? 아니면 인문학과 예술에 대한 접근이 막혔기 때문에 그리도 화가 났던 걸까?






말 그대로 나의 세상은 bouleversé 되었다. 현재가 의미가 없어졌으니 과거도 그리고 미래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계획했던 것, 하고 싶었던 것은 이제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적어도 인문학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없었다. 사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이유는 그 무엇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라는 부당함 때문이었다.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로 평온한 삶에 파동이 일었다. 그것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힘 때문에. 물론 살면서 부당한 일 한 번 안 겪어본 적이 있을까. 그러나 이런 류의 것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백신 패스가 가능한 사람들에게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동일한 그냥 평범한 하루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내가 느끼는 박탈감과 답답함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긴 방황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준 건 역사(그리고 성경)였다. 그동안 책에서만 봤던 역사가 어느덧 내 앞에 살아 숨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땅에서 일어난 일제강점기, 6.25이라는 부조리한 전쟁은 100년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갈 것도 없이 파리에 있을 때 코앞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말도 안 되는 죽음, 부조리와 불합리와 불평등. 나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사실 세상은 언제나 그래 왔다. 내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겪지 않았으면 사건은 그저 뉴스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게 나에게 닥치면 그건 곧 나의 일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역사의 단순한 명제가 이런 부조리함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아니란 걸 알려주었고 나는 진정으로(그리고 아마 처음으로?) 인문학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되었다.




                 Photo (C) RMN-Grand Palais / Agence Bulloz

Jean-Baptiste Charpentier, le Vieux, Allégorie. l'Histoire. Musée Carnavalet.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istory-Dielman-Highsmith.jpeg

History, mosaic by. Fredrick Dielman, Library of Congress of Washington D.C.

'역사'의 알레고리들


부조리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를 위로해준 건 다름 아닌 다른 사람들의 histoire; 역사이자 이야기였다. 그리고 도서관과 박물관 백신 패스가 해제된 순간, 그렇게도 설레었던 것을 보니 인문학(과 예술)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직까지 문화유산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인문학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음 이야기는 0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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