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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mine Dec 13. 2022

슈퍼스타가 된 가난한 프랑스 이민자가 내게 남긴 것

아프리카판 한일전, 프랑스 vs 모로코를 앞두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부터 2016년 UEFA 유로와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거쳐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동계 올림픽은 제외함..) 지구촌 최고의 스포츠 행사를 파리에서 지켜보며 2024년 파리 올림픽까지 당연히 파리에서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당연할 것 같았던 일상은 코로나로 완전히 뒤바뀌어버렸고 인생은 한순간에 뒤집혔다. 코로나 때문에 2020년 올림픽이 2021년에 치러질 줄 예상한 사람은 전 세계에 아무도 없었듯이,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이 마땅히 파리에서 파리 올림픽을 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나를 비웃듯(2024년 전의 이벤트는 말할 것도 없이), 2020년 도쿄 올림픽과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을 한국에서 맞게 되었다(물론 반대로 생각하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 2024년에 파리에 갈 수도?).



아직도 축구에 얽힌 개인적인 상처를 핑계 대는 것이 민망할 지경이지만 월드컵은, 축구는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보고 듣고 알았다는, 심지어 아주 잘 안다는 자부심(?)은 앞에서 말한 개인적인 상처와 버무려져 끔찍한 혼종을 만들어냈다. 스포츠에 국가주의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 그래서 월드컵만큼은 한국 사람이라 한국 팀을 응원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내가 좋아하는 팀을 응원했었다. 한국 대표팀과 붙을 때조차도.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프랑스 국가대표팀이었다. 그때는 헬조선을 탈출하고 프랑스로 이주하고 싶었던 명예 프랑스인에 빙의되어서 프랑스를 응원했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그저 프랑스 국대팀에 트레제게를 너무너무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명예 프랑스인이었다면 2018년 프랑스가 우승했을 때 발광하던 프랑스 국민들에 섞여 나도 같이 좋아했었어야 했는데(물론 나도 프랑스가 우승하길 바랐지만), 에펠탑 근처에서 광분하면서 경적을 울리고 정신을 놔버린 프랑스 국민들은 그냥 내가 집에 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었다. 그때는 프랑스에 살면서 환상이 깨지고, 익숙한 것에 속아 소중한 걸 잊어버렸다느니.. 이런 감상평을 적어냈었는데 그것보다는 아, 나는 그냥 어느 단체에 속하는 게 정말 싫고 소속감을 부담스러운 인간이구나, 단체로 모이는 건 정말 시끄럽구나, 다시 한번 실감했지. 어쨌든 어느 정도까지 프랑스 국대를 좋아했냐면, 2006년 독일 월드컵 한국과 프랑스 전에서 프랑스가 이기고 있어서 안심하고 잠깐 잠든 후에 졸린 눈을 비비고 후반전에 일어났더니 한국이 골을 넣어서 비기는 바람에 짜증을 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할 만큼 프랑스를 응원했었다. 결승전의 지단 박치기도, 승부차기를 실축해 눈물을 흘리는 트레제게 또한 당연히 16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월드컵이 끝나고 귀국한 대표팀을 반겨주던 프랑스 국민들 앞에서 트레제게가 앙리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던 그곳이 매일 버스 타고 지나가던 콩코르드 광장이었던 걸 문득 깨달았을 때 그 기분이란...



앙리 품에 안겨 울던 바로 그 사진. 나도 같이 울었다구~~

 

바로 콩코르드 광장의 그 Hôtel de Crillon. 그때는 당연했지만,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곳...




아무튼 지간에 4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나의 인생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가 대표팀의 지형 역시 달라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4년 전 무명에 가까웠던 10대 선수가 이제는 프랑스에 없어서는 안 되는, Les Bleus를 이끌어가는 최고의 스타가 된 것이다. 바로 킬리안 음바페(Kylian Mbappé). 아직 만 23세에 불과하지만 이번 대회 5골을 넣으며 득점 부문 1위에 올라 펠레의 기록도 갈아치운 그가 클로제의 월드컵 최다골 타이틀도 탈환하지 않을까. 전 세계의 축구팬은 기대하며 4강과 결승을 기다리고 있다.


2018년 월드컵, 음바페가 일약 스타덤에 오르면서 그의 고향을 취재했던 적이 있다. 음바페의 고향은 센생드니(Seine-Saint-Denis)의 봉디(Bondy)로 파리 북동부에 있는 도시이다. 순교자의 산인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목이 잘렸지만 자신의 목을 들고 8km를 걸어와 지금의 생드니 성당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프랑스 초대 주교 생드니(Saint Denis) 신부의 그런 전설적이고 신성한 이름과는 달리 유학생뿐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은 생드니와 파리 북쪽에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민자가 많은 곳, 프랑스 경찰들도 밤이 되면 안 들어간다는 소문이 있는 우범지역, 2015년 11월 테러범이 숨어 들어갔던 그 동네... 가능하면 발걸음도 하고 싶지 않은, 아무리 집값이 싸도 반드시 피해야 할 그런 곳. 겁을 잔뜩 먹은 나는 사전 작업만 하고 끝냈지만 여하간 이 작은 도시는 음바페 열풍으로 떠들썩했다. 도시 주민들은 음바페가 자신의 지역 출신인 것을 자랑했고 같은 이민자 출신인 아이들은 음바페처럼 또는 프랑스 국대팀에 포진한 여러 이민자 출신 선수들처럼 축구로 인생 역전을 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유일한 인생 역전의 기회는 축구뿐이기에... 실제로 봉디에서 실력이 좋은 선수들이 많이 배출된다고 했다.



2018년 월드컵 이후 샹젤리제에 있는 파리 생제르망 스토어. 네이마르는 구석에 처박히고 음바페가 메인에 뜨면서 그는 단번에 라이징 스타로 발돋움했다. 다음 월드컵 할 때까지 반드시 팀 옮길 거라고 호언장담했는데, 옮기기는 커녕 메시도 왔네. 네이마르도 계속 있고. 하 PSG 경기 한 번 봤어야 했는데.




조세핀 베이커에 대한 글에서도 썼듯이, 내가 본 프랑스는 누구나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이었다(단, 여러 조건이 필요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넘을 수 없는 언어의 벽, 아니, 죽을 만큼 노력해보지도 않고 이런 말 하기에 조금 우습지만 죽을 만큼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태생과 배경의 한계는 분명 존재했다. 그 벽을 경험할 때마다 프랑스 사회에 섞이지 못하고 일탈을 일삼고 결국 사회의 골칫거리가 되어 방황하는 이민자 2세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너희처럼 언어가 되고 국적이 받쳐준다면 나는 프랑스에서 뭐라도 했을 거야!'라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내가 프랑스인이었다면 나는 국가의 문화유산 conservateur를 양성하는 INP에 갔을 텐데!(그리고 갈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노력해서 다 할 수 있다면 너는 한국어를 잘하고 한국인인데 왜 서울대학교를 못 가고, 또 행정고시를 붙어서 문화부에 들어가지 못했냐?라고 물어보면 물론 할 말은 없지만... 한국에서도 이민자 출신,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는 한국과 프랑스에서 이미 지나갔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프랑스에서 나는 이민자 2-3세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누군가 보기에는 이민자 2-3세보다 유학생의 지위와 조건이 훨씬 더 낫다고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세핀 베이커에 대한 글이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amantedeparis/24




4년 후 더욱 거대해진 음바페 돌풍을 체감하면서, 세계인이 둥근 공과 음바페의 발끝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이렇게 열등감에 사로잡혔던 옛날의 내가 기억났다. 거기에 더하여 세월의 무상함은 보너스. 포르투갈에 놀러 갈 정도로 그토록 열렬히 사모했건만 이제는 안티에 가까운 동갑 친구 호날두가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 호날두의 마지막 월드컵은 불명예스럽게 끝나버렸다. 아직까지도 현역으로 뛰는 게 존경스러울 수준의 나이가 되어버린 호날두에 나를 투영하면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세월이여...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흘러간 시간이 무상함을 남긴 것만은 아니다. 자동으로 나이를 먹는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듯이 사실 세월보다도 코로나가 나의 각성에 훨씬 더 영향을 미친 것 같지만... 호날두가 왕좌를 음바페에 넘겨주는 사이, 헬조선 탈출만을 꿈꾸던 사대주의자 명예 프랑스인은 그사이 한국을 사... 사랑하기보다는 이해하며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프랑스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대신에 이제는 그 땅의 보이지 않는 문제와 아픔을 헤아려보는 제삼국의 시민이 되었다. 이민자 출신들과 비교하고 평생 가지지 못한 것만 탐하고 오지 않은 미래의 행복만 바라던 불만러는 그새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고자 하)고 오늘이 내 생 마지막 날인 듯 충실히 살아내(고자 하)는 작은 일에도 충성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지금이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때라고 되뇌며...





P.S. 프랑스와 모로코 전을 앞두고...

카타르 월드컵에서 불어닥친 모로코의 이변이 북아프리카의 햇볕만큼 뜨겁다. 식민지 본국이었던 스페인을 격파하고 또 다른 식민지 본국인 프랑스와의 경기가 남았다. 월드컵에서 차례로 복수극을 완성하려는 모로코의 집념과 염원이 느껴진다. 마치 한일전 같은 마음이어서일까. 프랑스와 모로코 전을 '아프리카판 한일전'에 비유하며 식민지배국의 동병상련을 투사해 모로코의 승리를 열원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럽 국가인 프랑스의 축구 국가대표팀은 대부분 이민자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 중에는 식민지에서 이주해온 가정의 자녀도 있다. 백인 국가였던 프랑스의 국가대표는 대부분 흑인이고, 오히려 모로코의 국가대표팀이 백인에 가까워 보인다. 뭐 어디 흑인뿐인가? 프랑스에는 마그레브에서 온 이민자가 넘쳐난다. 그만큼 프랑스의 다양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벨기에 전에서 승리하고 차를 불태우며 난동을 피우는 모습에, 샹젤리제에 모로코 국기를 들며 단체로 모여있는 광경에 약간의 충격이 되살아났다. 이번 월드컵을 숙고하면서 나의 열등감과 욕심은 치유되었지만 아직도 나에게 풀어야 할 상흔이 있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프랑스를 떠난 지 몇 년이 흘렀지만 한국에서 불쑥불쑥 마주치며 솟아나는 두려움과 충격은 다시 나를 파리의 길거리로, 지하철로, 테러가 난 그날로 데리고 간다. 나에게 칭챙총을 외치던 구찌 모자. 길거리며 지하철이며 호시탐탐 내 주머니를 노리던 사람들, 11월 테러 다음 날 길에서 만난 니캅들.. 그래서 결국 나는 프랑스를 응원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이렇게 거창하게 주절거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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