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3개월 정도의 9급 동사무소 민원대 생활을 마치고, 구청에 들어가 일 년을 보냈다. (파란만장 첫 구청 생활도 나중에 연재) 그리고 8급 승진을 했고 나는 다시 동으로 오게 되었다. 보통은 8급이라도 동에 선임 8급이 있기 때문에 다시 민원대로 가는 것이 부지 기수이다. 다만 달라지는 것은 민원대 선임이라서 등초본 인감에서는 벗어 날 수 있다는 것뿐이다.
나는 주민등록증, 출생, 사망 업무를 보다가 그 당시 서무가 교통사고로 장기 병가를 들어가는 바람에 운 좋게도? 일주일 만에 업무가 바뀌게 되었다. 그리곤 9급 때 늘 동경하던 업무였던 서무 회계를 보게 되었다.
드디어 민원 업무가 아닌 기안문도 쓰고, 결재도 받고, 예산도 다루는 그런 '일'같은 업무를 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초반에는 설레기도 했다.
모든 것이 서툴렀다. 당장 회계 업무의 기본이었던 예산서를 읽는 것도 힘들었다. 왜냐하면 처음 구청 발령이 하필이면 복지 부서로 난 바람에 동기들은 구청에서 예산 집행할 때 나는 수급자 심사를 하고 있었으니까. 공직생활 3년 만에 처음으로 예산서를 본 것이었다. 이 거대한 금액의 예산이 전산으로 어떻게 집행되는 것인지, 내가 이 버튼을 누르면 어떻게 은행이 돈을 주는 건지, 돈 액수는 왜 이렇게 커서 읽기가 힘든 건지, 증빙서류는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모든 것이 궁금증 투성이었다. 처음으로 지출을 하는 날엔 혹시나 버튼 잘못 눌러서 엉뚱한 곳으로 돈이 나갈까 봐 몇 번을 확인하고, 버튼을 누르고 나서도 은행에서 잘 못됐다고 전화가 올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동사무소 청사를 수선할 일이 생기거나 동장님 사무장님이 행사를 위해 이것저것 준비해라고 하실 땐 어느 목의 예산을 어떤 경우에 써야 하는지, 집행 절차는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명령만 떨어지면 겁부터 덜컥 나기도 했다. 지출해야 하는 서류들을 직원들이 내 책상 위에 놓고 가고, 동으로 온갖 고지서가 날아오고, 계약이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마다 회계라는 업무는 부담스러운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동장님과 사무장님 그리고 직원들과의 의사소통도 늘어나고, 기안을 올리는 일도 잦아지면서 이제 정말 일을 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특히 지출 업무는 정말 법에 규정한 대로 엄격하게 집행해야 했고, 증빙서류를 명확하게 첨부해야 했기 때문에 공부도 열심히 했었다. 첫 한 달은 서무회계라는 일의 틀에 익숙해지느라 금방 지나갔다. 그리고 두 달 세 달이 지나고 마침내 일이 제법 익숙해지자 이 일이 9급 때 생각하던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라 서무라는 단어의 의미 그대로 잡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특히 동사무소 서무회계는 회계 쪽보다는 서무 쪽에 더 가까웠다.
'서무'의 검색 결과 : 네이버 국어사전
특별한 명목이 없는 여러 가지 일반적인 사무.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
낮에는 단체원들과 손님이 자주 동에 찾아오시다 보니, 커피 타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커피를 안 타면 직원들이 나를 불렀다. "서무님! 커피 다 떨어졌어요." , "서무님! 내 컴퓨터가 갑자기 안되는데?", "서무님! 복사기 토너 다 떨어졌데요." (어쩌라고, 니가 좀 갈아라), "서무님! 화장실 문 고장 났어요.", "서무님! 정수기 안 나와요." , "서무님! 포스트잇 사다 놓은 거 없어요?", "서무님! 복사기 용지 걸렸어요." , "서무님! 간이 의자 어디 있지?", "서무님! 그때 그 구청에서 온 그거 어디에 뒀어요?"
시도 때도 없이 불리는 '서무님' 소리에 낮에는 거의 나의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 직원들이 사무실에만 나오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가 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복사기 토너를 교체하는 것도 쉬운 일이고, 컴퓨터도 안되면 거래처 보수 업체에 자기가 직접 연락할 수 있는 것이고, 용지가 걸렸으면 빼보려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인데. 막상 고장이 났다고 해서 안된다고 해서 가보면 단순한 오류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리고 물건을 찾아달라고 해놓고선 같이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내가 찾아줄 때까지 자기네들은 커피 마시고 수다 떨며 자리를 뜨곤 했다. 나는 맥가이버도 아닌데 서무가 어찌어찌하면 다 고쳐지는 것이고, 제대로 작동되는 것이었다. 집에서도 안 하는 짓들을 사무실에서는 서무라는 이름 아래에 직원들 뒤에서 다 해줘야 했고, 덕분에 나는 만능 기술자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여름에는 수박을 자르는 것도 서무의 주된 업무 중 하나였다. 서무 할 때 평생 잘라볼 수박은 다 잘라 본 것 같다.
그때는 사실 '서무님'이라는 호칭도 정말 싫었다. 보통 이 조직에서의 호칭은 '주사님'이다. 행안부에서 '주무관'이라는 공식 호칭을 만들어줬지만 아직도 이곳에서는 주사님이 더 편하다. 공식 직급 명칭은 보직이 주어지는 사람. 즉 6급 사무장부터 받게 되는데 (사무장, 계장, 동장, 과장 등등.) 희한하게도 보직이 없는데도 불리는 직급이 있다. 그중 하나가 '서무님'이고 '주무님'이다. 주무는 구청 계에서 계장 다음으로 책임질 것이 많은 무보직 6급 직원이다. 실제로 내가 만난 주무님들 중엔 주무님 소리가 너무 부담스럽고 듣기 싫다는 분들도 제법 많았다. 서무회계를 보던 4년 동안 나는 서무님이라는 호칭이 너무나도 듣기 싫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우리 과나 다른 과 서무님을 부를 땐 서무님이라 하지 않고 주사님이라 부른다.
어쨌든 하도 여기저기서 서무님을 불러대는 바람에 몸이 열개라도 모자랐다. 행여 급하게 처리해야 할 공문이나, 동장님 사무장님의 지시가 떨어지면 까먹을까 봐 늘 업무수첩에 메모를 했다. 오후가 되면 내 업무 수첩은 정말 사소한 업무까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일과가 끝나갈 때쯤에서야 겨우 자리에 앉아서 밀린 문서를 접수하고 지출을 처리하고 구청에서 온 공문을 처리하는 나의 본연의 업무를 할 수 있었다.
그밖에도 오늘 점심때 갈 식당을 정하고, 직원들에게 일일이 먹고 싶은 메뉴를 물어보고 미리 식당에 전화해서 음식을 준비해놓는 것도 서무의 임무였고, 치워도 치워도 다시 어질러지는 창고 정리도 서무의 업무였다.
창고 정리는 부서를 옮길 때마다 했던 것 같다. 동장님과 사무장님이 새로 오실 때마다 청사 환경정비를 신경 쓰시곤 했는데 그 일순위 타깃이 창고이다. 동사무소 창고엔 별것들이 다 있다. 민방위 물품이며, 복지 대상자를 위한 쌀포대며 야외 행사용 테이블, 의자, 에이포 용지, 방역물품, 그리고 보존해야 할 서류 등등. 전임 서무가 청소에 별로 관심 없었다면 내부는 더욱 전쟁터이다. 직원들이 함께 정리해야 함이 맞지만 (대부분이 직원들 업무와 관련 있는 물건이기에.) 업무 시간에 본인 업무 하기도 바쁘니, 잡무가 본연의 업무인 서무가 하루 종일 청소를 한다. 목장갑을 끼고 쌀포대를 나르고, 집에서도 하지 않는 무거운 물건들을 척척 들어 옮기고 하루를 꼬박 먼지 구덩이 속에서 보내곤 했다. 그 당시엔 몸이 피곤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지만 깨끗해진 창고를 보면서 혼자 뿌듯해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정말 바보 같다. 창고 정리하려고 시험공부해서 들어온 게 아니니까.
요즘은 직원 주말 동원 자제로 주말 행사가 많이 줄었지만, 그 당시에는 단체원과 직원을 동원하는 주말에 행사가 굉장히 많았다. 그래서 동에서는 점심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 점심식사가 도시락이었다면 정말 편했겠지만 그래도 예의가 있지라며 밥과 국과 수육을 기본으로 준비했다. 어느 가을날 주말에 열린 행사였을 거다. 전 동에서 부스를 차리고 박람회를 열었는데, 서무였던 나는 그날도 음식 나르는 일을 했다. 그날따라 단체원들이 많이 찾아주신 덕에 밥을 퍼도 퍼도 끝이 없었다. 결국 나는 행사장 한번 둘러보지 못하고 아침부터 행사 끝날 늦은 오후까지 우리 동 부스 뒤 천막에서 밥만 열심히 펐다.
그 이후 동기모임에서 그날 행사 이야기를 했다. 동기들이 나를 보고 "너 그날 왜 안 왔어? 우리가 너 찾으러 너네 동 부스에도 갔었는데 너 없던데?"라고 물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었다.
"아... 나 그때 메인 부스 뒤에서 밥 퍼고 있었어... 하루 종일."
그 말을 하고도 서글펐다. 밥 퍼는 게 나의 일이었다는 것이.
동에서의 첫 서무 생활을 마치고 구청에 가서도 또 서무회계를 했다.
구에서는 서무회계의 임무가 과장님을 보조하는 역할이 크다 보니 아무래도 한번 서무를 했던 직원들에게 또 서무를 시키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때도 환경정비에 관심이 많은 과장님을 만나서 창고 정리를 했다. 그래도 구청 서무가 동 서무보다 나은 것은 청사를 관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구청은 청사를 전담하는 부서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주요 업무는 과장님 스케줄을 챙기고, 회의자료를 만들고, 예산 관리와, 자료를 취합해서 제출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자료 취합의 경우엔 담당자가 뭉그적거리거나 제때 협조를 안 해주면 나는 속이 타들어 간다. 부서에서 독촉 전화까지 오면 스트레스 지수는 더욱 올라간다. 구청 과의 경우 대부분이 한참 선임이기에 아쉬운 내가 먼저 가서 알랑방귀를 뀌며 '자료 주세요~.'하고 예쁘게 말하는 것도 주요 임무 중의 하나였다.
구청에서 서무를 할 땐 이제 서무회계엔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던 터라 새로 들어오는 다른 과 서무들의 고민상담소이자 서비스 센터였고, 서무 여왕이라는 타이틀까지 얻기도 했다. 예산팀에서는 당시 처음 도입되던 예산서 작성 방식에 대해 나에게 물으라고 서무들에게 안내하기도 했다. 옆과 서무가 지출 통장에 구멍이 났다고 절절매길래 출장 서비스로 찾아가 함께 통장을 보고 전산을 대조하며 문제를 찾기도 했다.
나는 구에서의 서무 생활 2년 후에도 7급 승진을 하고 또 동에 와서 서무를 했다. 고로 도합 4년 반의 시간 동안 서무회계만 했다. 아마 한 번도 서무회계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특히 여자라면 더욱. 지금 생각하면 잡일을 너무 열정적으로 했다 싶기도 하지만 나의 공직생활에서 가장 재미있게 했던 일이 서무회계이기도 하다. 사람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더욱.
공직생활에 있어서 예산 집행은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분야이니 서무회계를 하면서 많이 배웠다. 각 부서에서 오는 공문들을 보면서 구청이 돌아가는 사정을 알아가기도 했다. 더불어 다른 부서 서무, 구청 여러 부서의 직원들과 연락하는 일이 많아져 친분도 쌓게 되었다. 이 조직은 그렇다. 어렵게 처리할 일도 직원을 많이 알면 순식간에 처리가 된다. 그래서 퇴직할 때까지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직원들이 있는 이곳에서 인맥은 중요한 것인데, 서무를 하게 되면 인맥을 확장하는 기회가 되는 것 같다.
가끔 이전 부서의 직원들이 그래도 나만한 서무가 없었다며 이야기해줄 땐 고마웠다. 그리고 내가 서무일 때 신규로 들어왔던 직원이 자신이 동으로 첫 출근 하던 날 내가 모든 기본 사무용품을 미리 사서 챙겨주어서 감동받은 것을 기억하며 그때 받은 계산기를 지금도 쓰고 있다며 고마워할 땐 뿌듯하기도 했다. 그랬다. 서무 회계를 할 땐 일로서의 성취감과 뿌듯함보다는 직원들에게서 과장께서 "고맙다.", " 수고했다."라는 말을 들을 때가 가장 보람 있었다.
물론 서무회계가 안 맞는 직원은 정말 안 맞다. 9급 때는 민원만 탈출할 수 있다면 뭐든 괜찮았는데, 막상 해보니 역시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 그리고 무엇이든 오래 하면 과유불급이다. 특히나 단위업무를 해야 하는 연차에 접어들었는데 어쩔 수 없이 서무를 하고 있으면 더욱 본인에게도 손해이다.
며칠 전 우리 과 서무가 나에게 넌지시 이야기했다.
동에서도, 이전 부서에서도 서무. 그리고 이 곳에서도 서무. 이제는 단위 업무가 하고 싶다고.
서무 회계는 한 번은 경험해보면 좋은 업무이지만, 두 번 세 번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