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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감한 망고 Mar 15. 2022

오늘 날씨 굉장히 맑은 거예요

한국 촌놈의 인도 상륙 1일차 (22.03.07)

이윽고 델리 공항이 보였다. 오후 열두 시 반 한낮의 델리가 발 아래에 펼쳐진다. 작고 네모난 집들이 토기인형처럼 다닥다닥 붙어 어디 하나 빈 공간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번잡스러운 풍경만큼 내 마음도 이런 저런 생각으로 정신없이 뒤엉켜 부풀어올랐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희뿌연 공기다. 비행기 날개 옆으로 보이는 하늘을 보며 이걸 황토빛 회색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면 회색빛 황토라 불러야 할까 싱거운 고민을 했지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 정도는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이잖아.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은데? 아름다운 파란 상공은 아니었지만 내 걱정이 조금은 유난스러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바리바리 챙겨온 도라지청이며 아홉 번 구웠다는 죽염이 빠른 시일 내에 소진되진 않을 수도 있겠다는 사소한 희망을 맛보았달까.


유난히 거친 착륙소리와 덜컹거림에 내 옆에 앉아 있던 누군가 말했다. 혹시 미세먼지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여서 랜딩이 불안정한 거 아냐? 에이 아무렴 그럴까. 그렇게 혼잣말을 했지만 어쩌면 그 깜찍한 발상이 참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술한 입국심사와 바닥에 널브러진 짐찾기가 끝나고 이제 문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저 문이 열리면 내 콧구멍 속으로 델리의 공기가 들어온다. 이게 그렇게 신날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나는 냄새를 맡는 강아지처럼 킁킁대며 델리를 맡았다.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맛이다. 옷 냄새, 신발 냄새, 눅눅한 땀 냄새, 수많은 혼다와 기아가 토해 내는 매연 냄새. 이것들이 한데 섞여 작은 구름처럼 내 콧구멍 속으로 들어 온다. 공기 입자가 코털을 지나 기도를 타고 폐 어디쯤에 도착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 3초만에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이곳은 한국이 아니라 인도다.


땡감을 핥아버린 혀처럼 어딘지 모르게 떫떠름한 델리의 공기가 자꾸 밀려온다. 입 벌리면 미세먼지 더 들어 오니까 차라리 말을 하지 말자. 코로만 숨 쉬면 돼. 코에는 코털이라도 있잖아. 별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어느새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 몸에 난 털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는 근엄한 목소리가 영화 속 장면처럼 스쳐간다. 그렇다면 체모 입장에서는 인생역전의 땅에 온 셈이다. 주기적인 레이저 공격으로 수년간 박해받아온 체모가 그간의 앙금은 잊고 다시 무럭무럭 자라주길 바라야 하는 걸까.

오미크론 막아 보겠다고 새부리처럼 동여맨 KF94 마스크가 사실은 오미크론보다 더 사악한 놈을 막아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오미크론 걱정할 때가 아니다. 델리의 공기가 열 배는 더 위험해 보인다. 아까 비행기에서 말한 '생각보다 괜찮은데'는 서둘러 취소. 도라지청 바리바리 싸오길 천만다행이라는 쪽으로 그새 마음이 기울었다.


오늘 날씨 굉장히 맑은 거예요. 이런 날 나가서 돌아다녀야 하는데. 겨울에는 이것보다 몇 배는 안 좋아요. 밖에 못 나갈 걸요. 공항으로 마중나온 S가 말했다. 뉴델리 일 년 날씨 중 가장 맑은 시즌이 시작되었다고. 아주 좋은 때에 왔다고. 이런 저런 날씨 얘기를 시작으로 1년 먼저 들어와 시작한 인도 라이프를 들려준다. 제일 먼저 묻고 싶었던 미세먼지를 알아서 제일 먼저 얘기한다. 어쨌든 확실한 건 여름철 델리가 그나마 하늘이 파랗고 가을지나 겨울되면 잿빛으로 뒤덮인단다. 지금은 3월이고 이제 막 여름의 초입에 들어섰는데 벌써부터 겨울이 두렵다면 내가 너무 겁쟁이 같으니까 아니라고 우겨보련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는 인도에 왔다. 이제와서 미세먼지가 걱정이라는 말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그 정도 쯤이야 한국에서 실컷 조사하고 왔으니 별로 놀랄 일도 아니건만 그래도 사진으로 본 것과 코로 맡은 것은 사뭇 랐다. 공항 택시 승강장에서 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그거 잠깐 숨 쉬었다고 벌써부터 눈알이 따갑고 목구멍이 매캐하다. 신입에게 텃세를 부리는 얄미운 선배처럼 델리의 공기가 나를 비웃는다. 그래도 벌써부터 델리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어찌됐든 내가 살아갈 터전인데 아쉬운 놈이 수그리고 들어가야지.


어이, 델리! 우리 같이 살아보자. 한번 잘 살아보자. 그렇게 지내다 보면 나도 너도 찌푸리는 날보다 웃는 날 많아지지 않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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