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을 해야 했던 고3의 이야기
고등학교 3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우리학교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선택과목을 직접 선택하여 배우는 방식이었는데, 예체능 분야에서는 음악과 미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고, 1학년 때 미술을 배워보니 별로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2년 내내 음악을 선택했다. 한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면, 나는 노래 부르는 것에 정말 자신이 없는데 3학년 음악에는 평가 항목들 중 '성악'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택과목을 결정할 당시에는 '그때가서 생각하지 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별다른 고민없이 음악을 골랐다.
그러나 막상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성악으로 가창 평가를 보는 날이 다가왔다. 곡은 이탈리아 원어로 불러야하는 노래였다. 다행히 평가방식은 음악실 안에 있던 작은 방에서 선생님과 1:1로 시험을 보는 방식이었지만, 그럼에도 잔뜩 발음을 굴려서 고음이 반복되는 성악곡을 불러야한다니 왠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성악곡은 사랑 노래였는데, 선생님께서 정말 상대를 유혹하듯이(?!) 감정을 살려 연기하듯이 부르면 가산점을 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평소같으면 그냥 대충 얼버무리듯 부르고 말았겠지만, 당시 고3이었던 나는 이 평가 하나하나가 내신으로 산출되어 나의 대학 입시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잘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가창평가에서 만점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정도로 노래에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노래로 만점을 받을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으로 추가점수를 받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발음과 감정을 살리기 위해 매일 밤 야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노래 연습을 했던 것 같다. 혀에 버터라도 바른 것 처럼 발음을 굴려야하는 이탈리아어로 노래를 부르고 있자니 스스로의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해야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그 때는 어떻게든 열심히 노력했다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틈만 나면 연습했었다.
그리고 시험 당일, 랜덤으로 순서를 정했는데 나는 뒷번호가 뽑혔다. 나는 이름 순으로 하면 앞번호에 가까워서 매번 먼저 시험을 보곤 했는데, 오랜만에 뒷번호라 준비할 시간을 조금 벌었다는 기분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수업이 한 시간이다보니 시간이 빨리 지나가서 성악 곡을 몇 번 읖조리다보니 금방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거의 한 달 가까이 연습한 곡이다보니 정말 자신있게 부를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떨렸던 것 같다. 처음에 시작을 어떻게 해야할지조차 망설일 정도로 긴장했는데, 또 막상 시작하니 연습한 것이 몸에 베어있어서 노래를 잘 끝마칠 수 있었다. 그날따라 무슨 용기가 생겼던 건지 그 방 안에서는 나 혼자 노래방에 왔다는 생각으로 선생님 앞에서 열창을 했던 것 같다.
비록 내가 곡을 완벽히 이해하진 못해서 만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기대했던 점수보다는 훨씬 높게 받아서 학기말엔 음악으로 교과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음악선생님은 나를 3년간 가르쳐주셨던 선생님이셔서 나의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잘 알고 계셨는데, 내가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선생님도 놀라셨는지 생활기록부에 이 시험과 관련된 나의 칭찬을 적어주셨던 기억이 있다.
나는 어디선가 "삶은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폭풍우 속에서도 춤추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 글을 적다보니 그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사실 고등학교 생활 내내 주변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자신감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조금만 자신이 없는 일이 있으면 뒤로 물러서기 일쑤였고, 내가 위에 적은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 "너가? 진짜?" 이런 반응이 돌아 올 정도로 다른사람의 시선도 많이 신경쓰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조차도 스스로를 소극적인 사람이라는 틀 안에 가둔 적이 많았는데, 이 경험은 고등학교 시절 중에 내가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한 몇 안 되는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또한 이것은 내가 이 책의 첫 글에서 나의 고등학교 생활에서 후회가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적은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면서 언제나 자신있는 일만 할 수는 없다. 자신없고 숨고싶고 내가 못 할 것 같은 일들도 수도없이 하며 살아야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즐기며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자신있게 뛰어들어 오히려 비를 흠뻑 맞으며 춤추다보면 어느샌가 두려움을 극복한 자신있는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