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해안가 시인들처럼

행복하게 살기

by 엠버

11월 30일


매일 쓰는 일기마저 적기 싫어지는 날이 있다. 이는 너무 지친 나머지 노트북을 열어 타자를 치는 것조차 힘들다는 의미일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삶이 너무 여유롭다는 것의 반증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후자일 때가 많다. 삶에 재미있는 요소가 많으면 굳이 일기를 적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글을 적는 공간을 오래 방치해놓기가 쉽다. 또한 여유롭다고 해서 다 재미있는 하루는 아니기에 가끔은 유튜브만 보는 무료한 하루를 보낼 때도 있는데, 그러면 더욱 그 증상이 심해진다. 일기에 남기고 싶은 말도 없을 뿐더러 괜히 글을 적으려고 하면 미뤄두었던 할 일들이 다시 생각나면서 유튜브로 도피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대학에서 글쓰기 수업을 수강하며, 글에 대한 평가를 지속적으로 받다보니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다. 그래서 글을 적는 행위를 떠올리는 것조차 눈물이 날 만큼 싫었고, 글에 대한 애정이 사라졌었다. 부족함 많은 글이지만 소소하게 기록하는 행위를 즐겼던 나로서는 취미를 하나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무료한 날들을 보내던 와중 최근에 도서관에 다니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보니 작가들에 대한 존경심을 원동력삼아 내 기록을 다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결심을 드디어 오늘 실행에 옮기는 중이다.


이번 주말에는 속초 할머니댁에 다녀왔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댁은 늘 북적이는 횟집이었으니, 사실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푸근한 고향같은 이미지는 없었다. 나에게 할머니댁은 공부를 할 수도 없고, 누워서 쉴 수도 없는 불편한 공간이었으며, 술취한 얼굴로 큰 소리를 내는 손님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곳이었다. 할머니가 퇴근하실 때까지 가게에 앉아있어야 하기에 늘 피곤한 일정으로 인식되었고, 학생 때까지만 해도 가기 싫다는 어리석은 변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매번 속초에 도착하면, 불평했던 스스로를 반성하고 부끄러워하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속초의 횟집 거리는 성실한 사람들의 집합소와 같은 곳이다. 새벽부터 불이 켜지는 가게 안에서는 각자의 고된 일상이 어떠한 기별없이 흘러간다.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휴일 없이, 밤낮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이들의 꾸준함은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지친 하루 속에서도 소소한 행복을 놓치지 않는 그들의 일상을 보고 있으면 그들을 본받고 싶어진다. 김종삼 시인은 시「누군가 나에게 물었다」에서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세상의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분명 머리로만 이해하던 내용이었는데, 속초의 풍경은 이 시를 바로 눈 앞에서 보여주었다. 손님이 없는 오후에 카페에 모여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삶을 종이에 적으면, 모두 한 편의 감동적인 시가 될 것만 같았다.


집에 가는 날, 하루종일 주방에서 힘들게 번 돈으로 손녀 대학가서 커피 사먹으라며 용돈을 주시는 할머니의 모습은 내 마음 저 깊은 곳의 양심을 찌른다. 왠지 현금으로 받은 돈은 쉽게 쓰지 못할 것 같고, 실제로 그렇다. 부모님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공부하는 심정이 이와 비슷할까. 현재 아무런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나는 또 이렇게 받은 용돈으로 편안한 미래를 즐길 것이다. 할머니가 일하시는 모습을 직접 보고 알아서일까 죄송하면서도 할머니께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집에 돌아와 글을 적는 밤 10시, 할머니는 내일 장사를 위해 주무실 시간이다. 나는 그들이 내게 주었던 삶의 영감을 간직하며 내일 하루를 성실하게 잘 버텨낼 것이다. 나의 내일과 할머니의 내일은 어떤 시가 될지 궁금하다. 내일 저녁엔 할머니보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봐야겠다.


(p.s. 여름 이후로 네 달만에 글을 적으니 머릿속에서 단어가 굳은 기분이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글이 잘 써지지 않아서 불편하다. 오랜만에 글을 적는 이 시점이 또 다시 돌아온 시험기간이라는 사실이 야속하지만, 앞으로는 자주 와서 글을 적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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