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속도를 지켜준 시간.

by Amberin

서로의 속도를 지켜준 시간.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이제 이 여행의 막을 내려야 하는 아침.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공기와 리듬을 뒤로하고,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날이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다섯 명이 사는 지역은 모두 달랐고,

그 거리는 꽤나 멀었다.


파주, 송도, 수원, 부산, 그리고 자카르타.

어쩌면 평생 스쳐 지나갈 일조차 없었을지도 모를 우리가

이번 여행을 위해 발리공항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이틀 후 뚤람벤 숙소에서 만났다.)


각자 다른 표정과 마음을 안고 있었지만,

그날의 첫인사는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여기요, 여기!”

“아, 반가워요!”

서툴고 어색한 인사 대신

눈빛 하나로 마음이 먼저 열렸다.


서로에게 다가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낯선 이들과의 여행은

대개 조심스럽고 예민한 시작을 동반한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려면

시간보다 더 많은 여유가 필요하니까.


그런데 이번 여행은 조금 달랐다.

긴장과 눈치 대신

웃음이 먼저 흘러나왔고,

어색함은 대화 몇 마디에 금세 사라졌다.


만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우리의 리듬은 자연스럽게 맞춰졌다.


어떤 스타일의 여행을 좋아하는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지,

어떤 순간에 더 반짝이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느껴졌다.


“내일 여기 가보고 싶은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면,

“오, 나도 거기 궁금했어요. 같이 갈까요?”

혹은

“좋다, 그래요 다녀와요.

저희는 근처 바다에 나갔다 올게요.”


함께하는 것과 흩어지는 것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던 여행.

그 배려는 부담 없었기에

분명하게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걷고, 함께 웃었고,

어떤 날은 길을 헤매기도 했다.

하지만 길을 헤매는 순간조차

일정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앞서가면,

누군가는 뒤에서 속도를 맞췄고,

그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해변으로 노을을 보러 걸어가던 길,

웃음소리는 바람을 타고 길게 퍼졌고

길리 해변의 노을 앞에서는

누구랄 것도 없이

말없이 그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노을이 천천히 바다를 물들일 때,

우리의 마음도

그 풍경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낮에는 각자의 리듬으로 흩어졌다가도

저녁이 되면 꼭 한자리에 모여 앉아

하루를 정리하듯,

각자의 여행길에서 만난

작고 특별했던 순간들을 꺼내놓았다.


저녁 테이블 위의 음식보다

더 풍성했던 건 우리의 대화였다.


“오늘 진짜 웃겨서 눈물 날 뻔했어요.”

“맞아요, 나도요. 너무 좋았어요.”

누군가는 실수담을 털어놓았고,

누군가는 진심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그 밤의 공기는 언제나

따뜻하고 가벼웠다.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곁을 내어주는 사이.

그 관계의 온도가

이번 여행을 더 오래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여행의 마지막 날.

아직 떠나기 전인데도

이 여행의 장면들이

벌써부터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덩그러니 놓인 캐리어를 정리하다 말고

문득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저녁을 먹으며 넘겨본 여행 사진 속의 나는

참 밝고 자연스러웠다.

그 밝음의 이유가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걸



이 낯선 여행에서

내가 가장 깊이 느낀 건

‘배려와 다정함’이었다.


눈에 띄게 크지 않아도,

필요한 순간마다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마음.


골목길을 걷다

뒤처진 사람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걸음을 늦추고,

식사 메뉴를 고를 때도

서로의 취향을

먼저 떠올려 주던 순간들.

그 작고 사소한 배려들이

기억보다 오래 마음에 남는다.


이 여행을 함께할 수 있었던 시간에

마음 깊이 고마움을 느낀다.


오랜만에 떠난 낯선 여행지에서 만났기에

더 선명하게 남은 얼굴들,


서로의 하루를 존중하며

조용히 곁을 내어주던 순간들 덕분에

열흘이라는 시간은 내 마음속에

반짝이는 추억으로 자리했다.


이제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다른 일상을 살아가겠지만,

함께 웃고 걷던 그 장면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헤어짐이 아쉬워서

이 여행이 더 소중해졌고,

끝이 보이기에

마음은 더 깊어졌다.


여행의 마지막 날,

이별의 감정까지도

이 여행의 일부로 조용히 품어본다.


낯선 여행에서 만난 마음들이

앞으로의 익숙한 하루를

오래도록 따뜻하게 밝혀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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