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프리지아
역에서 나와 얼마 걷지 않는 거리에 허름한 동네 꽃집이 하나 있다. 가게 문 앞엔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발칙하게도 두 대나 버티고 있다. 원래 아이들 과자 팔던 자리였는데 문을 닫으면서 남겨놓은 유산이었다. 꽃집은 그 터의 역사를 나름대로 계승한 셈이었다. 지금도 수업 끝난 초등학생들이 냉장고 앞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걸 보면 남겨둘 만하다 여겼던 사장님의 혜안이 퍽 존경스럽다.
봄을 맞이하는 나만의 작은 의식이 있다. 바람에서 봄내음이 맡아질 때면 이 꽃집에서 프리지아를 한 움큼 산다. 종이 포장지로 돌돌 말은 꽃다발을 한 손에 들면 발걸음이 절로 들떠버린다.
행복은 참 얄팍했다.
제일 좋아하는 꽃은 아닐지라도 봄이면 집안에 프리지아를 꼭 들여놓는다. 봉오리는 앙증맞은데 향기가 금새 퍼져 좁은 화병에 꽂기 안성맞춤이다. 심지어 마르는 모양새도 어여쁘다. 대가리가 큰 장미는 고개가 푹 꺾여 자주 볼썽사나운 결말을 맞이하곤 했다.
눈높이에 꽃을 올려두는 버릇은 첫 회사에서 배웠다. 어느 해인가 다른 층에서 일하는 동료의 자리에서 프리지아를 발견했다. 볼펜과 가위가 두서없이 꽂힌 연필꽂이에 한 다발이 툭 꽂혀 있었다. 병아리를 닮은 색이 그대로 말라붙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에 감히 닿지는 못하고 그 주위를 빙빙 맴도는 스스로를 구태여 들춰낸다. 일찍이 포기했던 꿈, 아직 되지 못한 모습, 스쳐 보내고자 하는 사람. 분명 과거를 돌이켰는데 현재와 미래가 뒤섞여 보이는 건 떨쳐낸 줄 알았던 나의 미련 때문이겠다.
그저 봄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현재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