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
중고등학교에서 영어그림책? 장난하나?라고 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감성을 자극시키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기도 하기에,
단순하지만 강렬한 힘을 가진 영어그림책을 내가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몇 등급이 나오는지 중요하고, 남을 이겨야 내가 살아남는 대학교 입시 앞에서의 냉혹한 현실에서, 가끔씩 이런 힐링을 할 수 있는 수업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출구가 되기도 한다.
그림책은 아이들이 원어민처럼 영어를 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그들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게 해주는 강력한 도구이기도 하다.
특히, 영어 조기교육이나 사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더더욱이나, 이런 서포트가 가끔씩은 필요하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 한 반에서 영어 말하기 평가를 보는 날이었다.
가상의 인터뷰 상황을 정해놓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미리 대본을 만들어 연습하고,
영어선생님인 나와 1:1로 복도에서 인터뷰를 보는 형식의 시험이었다.
아이들의 영어실력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기에,
어떤 아이는 대본을 쓰자마자 곧바로 자신이 쓴 내용을 모두 외우고, 발음과 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시험을 보는 아이도 있고, 그렇지 못한 아이도 있었다.
본인이 쓴 대본을 미처 다 외우지 못한 한 아이가 나와 1:1로 마주 앉아 말하기 평가를 보게 되었다.
아무리, 학생들이 선생님을 편하게 대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시험인지라 많은 아이들이 긴장을 하고 시험에 임했다. 이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들고 다니며 외워서인지, 꼬깃꼬깃 접힌 대본 종이와 얼굴에 송송이 맺힌 땀방울이 아이의 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이가 내 앞에 앉자마자, 나는 긴장을 풀어 주려 “안녕, 동민아. 너무 긴장 안 해도 돼.”라고 말했지만, 아이의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평소에 동민이는 기분 좋은 농담으로 수업 분위기를 유쾌하고 부드럽게 해주는 학생이다. 유독 덩치도 크고, 얼굴도 하얀 그 아이는, 마음이 여유로워 친구들이 많이 따르는 아이이다.
그런 아이가 이렇게 긴장을 하니, 내 마음도 영 편치 않았다.
아무리 외워서 보는 시험이라지만, 영어라는 언어 자체가 높은 벽인 아이에게는 많이 부담되는 시험임에는 분명했다.
동민이는 천천히, 조금 많은 발음 실수와 함께 꿋꿋이 말하기 시험에 임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말하기 시험을 완주했다. 내가 영어로 질문하면, 동민이는 숨을 들이쉬고, 깊이 생각한 다음, 자신이 썼던 대본을 조심스레 기억해 냈다.
그렇게 영어 말하기 시험을 완성한 동민이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교복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나는 아이가 너무 대견해서 “동민아. 정말 잘했어. 끝까지 완성했어. 멋져!”
나는 동민이의 멋쩍은 시그너쳐 웃음을 기대했다. 가끔 그 아이가 멋쩍게 웃는 순수한 10대만의 웃음.
하지만, 동민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죄송해요…”라고 말했다.
순간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순수한 그 아이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순수한 열정으로 임한 그 아이가, 죄송하다고 말했다.
영어를 잘 못해서 죄송한 걸까. 아니면, 영어선생님의 기대에 못 미쳤다고 생각해 죄송하다고 한 걸까.
나는 순간 울컥했지만, 웃으며 대답했다. “뭐가 죄송해. 이렇게 훌륭하게 해냈는데.”
동민이는 그만의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샘, 이 책상이랑 의자 다시 교실로 넣을까요? 제가 반에서 인터뷰 마지막이었어요.”
동민이는 끝내 무엇이 죄송했는지 말하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수많은 일들을 계기로 문학과 영어를 접목시키는 수업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민이와의 말하기 시험은 내가 왜 아이들의 “삶의 이야기, 감정, 생각”을 들을 수 있고, “영어에 대한 부담 없이” 영어를 접할 수 있는 수업을 깊이 고민하게 되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물론, 입시와 교과서 영어 위주로 수업해야 하므로 모든 수업을 문학을 접목하고 토론을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한 학기에 한 번만큼은 영어에 대한 부담 없이, 원어민처럼 말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는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이들이 영어를 더 이상 강박적으로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생각하고 표현하는 여러 도구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다른 동민이가 마음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문학으로, 영어 그림책으로 영어수업을 하는 이유이다.
모든 아이들이, 빛나는 지구 위에서 빛나는 성장을 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