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뭔가 이상하게 흘러가네
이어서 손끝이 느끼는 미세한 이상(異常)
신경쓰지 않으면 꼭 두 장씩 넘기는
검지야, 하고 부르면 이제 대답도 아니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자랑거리도 아니었지만
책장을 구기지 않고 넘기는 건
나 홀로 뿌듯했던 재주였다
뒷장 글씨도 읽을 수 있던 '엣센스' 영한사전
정확하게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나는 사랑했다 생생한 그리고 고개숙인 적 없던
젊어서 칼 같던 손가락을 그리고 그 표면에서
길들여지지 않겠노라 소용돌이치던 무늬를
ㅡ 나는 무인민원발급기를 이용 못 해
지문이 인식 안 되거든
글쎄 운전학원에서도 지문이 안 찍혀서
매번 수기로 출석했지 뭐야
누구한테 그렇게 손을 비볐어
ㅡ 그러게 이쯤 비볐으면 누가 뒤를 봐줄 때도 됐는데
(그리고 내 뒤를 봐줄 이 누가 있나 정말로 따져본 건 비밀)
이 책 내용이 뭐야?
ㅡ 제가 책을 두 장씩 넘겨서요
다시 읽어볼께요
돌멩이를 던져도 파문이 일지 않는 연못 따위
메워버려야 하지 않아?
ㅡ 그럼요 암요 암요
제가 바로 보고서를 만들어 올릴께요
손가락에서 A4용지가 미끄러져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