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여기에..
코가 뚫렸다.
장장 한달 이상을 달라 붙어 있다가, 끝내 성대를 질식하게 했던 알레르기 비염이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배설될 줄이야.
'천국은 다른 곳에'
인기 있는 다른 책들은 이미 다른 선생님들이 가져가고 '아빠의 경제학'과 '미생' 사이에 그 책은 조선의 기생처럼 조신하게 앉아 있었다.
실습 시험 감독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그녀만을 가슴에 품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담한 체구에서는 신입생 시절 하숙방 냄새가 났고, 표지에는 누군가 원두 커피 받침으로 사용 한 듯 둥그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채점과 채점 사이 그녀는 할머니와 손자의 이야기를 번갈아 가며 해주었다. 타히티의 태양과 남부프랑스 지하 면직 공장의 음침함. 자유로운 이혼과 터부 없는 성욕. 정치와 예술. 분노와 쾌락 같은 냉탕과 온탕을 리드미컬하게 피스톤 질 하였다. 냉탕과 온탕의 공통점은 물로 차있다는 것이고, 이 불혹나이 즈음의 할머니와 손자는 '자유를 위한 끝없는 행동'으로 충만했다는 것이다. 물이 한가지 모양이 아니듯이 그들은 늘 꿈을 꾸고 꿈으로 향하고 꿈을 현실로 만들면서 살아갔다.
"시험이 종료 되었습니다."
저녁 여섯 시 십칠 분. 일상의 커튼 바깥에서 허락된 사치스러운 시간이 종료되었다. 옷고름은 절반 밖에 풀지 못해서 할머니는 페루로 가는 배에, 손자는 폴리네시아 제도로 가는 범선에 아직 있었지만, 쿨하게 책장에 꽂아 넣고 뒤돌아 섰다. 마침 열려있던 창문으로 넘어온, 겨울 냄새 찌든 밤공기가 내 양쪽 콧구멍을 거칠게 범한다.
절정의 끝에서 코는...... 싸버렸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데이터도 끄고 와이파이도 껐다. 폴 고갱의 그림이나 플로라 트리스탕의 책을 검색하고 싶은 마음 한 켠의 유혹을 참기 위해서다.
'조금만 참아라.
조금만 참아라.
피곤한 몸은 곧 잠들고 곧 꿈꾸겠지..
내일이 되면 아이들이 오고,
천국은 여기 에 있으니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