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
태어나 보니 이미 있었던 것들이 있었다.
세상이 이미 만들어져 있었고 그 안에 엄마와 아빠가 있었다. 밤에는 달이 있었고 낮에는 해와 바람이 있었다. 소리를 내면서 흐르는 물이 있었고 나무와 흙과 기어 다니고 날아다니는 작은 것들이 있었다. 나의 삶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방바닥과 엄마를 기본으로 세팅해 놓았다. 엄마는 내가 먹고 자고 싸는 일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왔고 방바닥은 태초의 혼돈으로부터 나를 구하기 위해 나의 육체를 지지했다.
내가 발을 바닥에 딛고 설 수 있을 때부터 나는 이미 있는 세상으로 나와 마치 그것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경악했고 즐거워했다. 거기에는 흐르지 않는 것 같은 시간과 내가 나인지 엄마인지 아니면 내가 보고 있는 바로 그것인지 명확하지 않은 경계가 내 자아를 이루고 있었다.
뜨개질하는 엄마 옆에 앉아 라디오에서 나오는 유행가를 흥얼거릴 때에 나는 유행가의 리듬이 되었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빗줄기가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면 나도 빗줄기처럼 아래로 흘러내렸고 유행가의 구슬픈 멜로디에 압도되어 엄마의 목에 매달리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낮잠이 들었을 때를 틈 타 가끔 일을 보러 다녔다. 낮잠에서 깨 엄마가 없으면 나는 조금 울다가 엄마가 곧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울음을 그쳤다. 엄마에 대한 신뢰가 있었던 것 같다.
엄마가 없는 집은 적막 그 자체였다. 가구와 사물들이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낯선 모습으로 제자리에 있었다. 방바닥에 앉아서 그것들이 조금은 나를 외면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마치 나를 잠시 맡아주는 어떤 사람처럼 그들은 엄마가 나를 부탁할 때 웃으면서 걱정하지 말라 말하고 엄마를 보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없을 때 그들은 내게 무표정을 짓고 자기들의 볼 일을 보았다. 엄마가 돌아오면 방안은 갑자기 환해지고 가구들도 따뜻해졌다. 그들은 엄마 앞에서만 온화했다. 가끔은 엄마가 없어도 울지 않고 깨어나 마침내 돌아올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고무장갑을 빨아 놓기도 했다. 엄마는 고맙다고 칭찬해 주었지만 예리한 내 눈은 엄마가 당황해하던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상태가 늘 괜찮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엄마가 없는 것에 짜증과 심통이 났다. 그날도 자다 일어났는데 엄마는 없었고 두 살 위인 오빠만 마루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울다가 옷에 오줌을 싸버렸다. 오줌의 따뜻한 물줄기가 엉덩이를 적시고 발 쪽으로 느릿하게 범위를 확장해 갈 때 나는 창피해서 오빠를 때리면서 더 크게 울었다. 오빠의 친구들은 나의 난동을 보다 못해 집으로 돌아가 버렸고 나도 오빠에게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빠밖에는 내 마음을 쏟아낼 사람이 없었다. 우는 것도 힘이 들었는데 우는 것 밖에는 어떤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눈물도 나오지 않는 울음을 오래도록 울면서 엄마를 기다렸다. 마침내 엄마가 돌아왔고 침착하게 나와 오빠를 달래주며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나는 엄마의 품에서 엄마의 냄새를 맡았고 엄마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엄마는 나와는 뗄 수 없는 사이였고 엄마가 곧 나였다. 엄마의 형상, 엄마의 말, 엄마의 모든 행동이 나의 존재와 아주 밀접한 것이었다.
엄마 없이 어느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동네의 가게 건너편에 있는 어느 자매의 집이었다. 엄마와 가게를 드나들 때 나는 그 집에서 대문 밖을 빼꼼 내다보는 자매를 보게 되었다. 내가 호기심으로 자매를 따라 그 집 대문을 넘어서면서 그들과 알게 되었다.
그날은 그 집 안도 들어가 보고 싶었다. 자매는 아빠가 누구도 데려오지 말라고 했다며 나를 집에 들이기를 겁내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와 놀고 싶어 했다. 결국 나는 자매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고 우리는 숨바꼭질을 했다. 내가 숨어야 하는 역할이 되었으므로 숨기 위해 그 집의 여닫이서랍장에 들어갔다. 문의 손잡이를 열고 몸을 구겨 넣고 나서 술래가 나를 찾아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술래는 어쩐지 나를 찾지 못했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난 것 같아 나는 나가기로 했다.
내가
“나 여기 있어.”
라고 소리를 치고 문을 열었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몇 번 더 열어보려고 했지만 열어지지 않자 나는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자매들은 나의 소리는 듣고 있었지만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다 자매들의 아빠가 집에 돌아왔다.
자매들끼리
“아빠 왔다, 이제 어떻게 해.”
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문을 몸으로 밀었고 덕분에 곧 서랍장에서 나갈 수 있었지만 나를 내보낸 서랍장의 문은 부서져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내가 나가자 자매의 아빠와 자매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이 상황이 도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그들도 내 마음과 별반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내가 사라질 때까지 그저 나를 보고 서 있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빠르게 걸어 집으로 향했다. 구름이 하늘 전체를 뒤덮고 있어 온통 암울함에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 하천을 왼편에 두고 윤희네 집 쪽에 거의 다다랐을 때 길가에 염소 한 마리가 있었다.
염소는 무서운 얼굴로 나를 보고 음메 하고 울었다. 나는 염소 앞에 서서 염소를 노려보았다. 염소는 묶인 줄이 팽팽해지도록 서서 나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노란 자위에 검고 긴 눈동자가 나를 보는 모습 때문에 나는 공포에 질렸다. 하지만 나는 염소를 극복해야만 했다. 염소를 지나쳐야지만 집으로 갈 수 있으니까. 그것은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용기를 가지고 뛰어 마침내 염소의 사정거리 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 하늘을 보았다. 무거운 구름이 점점 걷히자 하늘이 밝아졌고 그러자 곧 해가 저물면서 하늘이 이상한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주황색이던 하늘이 격렬한 빨강이 되었고 노랑과 분홍이 어우러지면서 보라색이 되었고 보라색은 다시 남색이 되었지만 이미 지나쳐 버린 색깔들이 남색 안에 조금씩 남아 있었다. 나는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두려움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어두워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하늘을 보았다. 어둠이 찾아오자 세상은 그 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동네가 익숙한 냄새를 풍길 때 멀리에서부터 엄마가 나를 찾으러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어둠 속에서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의 손을 잡으면 나는 엄마의 세상으로 속해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익숙한 세상에 들어온 것에 안도했다. 엄마의 세상에는 자매의 아빠도 없었고 염소도 없었다. 엄마의 세상은 밝고 따뜻했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고 어느 세상에라도 속할 수 있었다. 내가 땅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벌레를 보고 있으면 나는 벌레가 될 수 있었고, 재래식 공동 화장실에 들어가 볼 일을 볼 때면 나는 똥이 되었다. 낮잠에서 깨어나 울다 지친 나의 얼굴을 쓸어주는 바람이 되기도 했고 담벼락에 만들어진 그늘의 세상에 속해 서늘함이 되었다. 꿈속에서 나는 몇 번씩이나 자매의 집 서랍장 속에 갇혔다가 서랍장 문을 부수었고 돌아오는 길의 염소가 되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내게 놀랍도록 아름다운 경이 속에 속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했다.
엄마의 손을 잡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처음 본 노을에 감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으로 나와 고작 몇 해를 보낸 나에게 무섭고도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는데 세상의 문이 나를 향해 모두 열려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