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에 끝에서 배운 바가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실패일까
우리는 어차피 실패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절박한 질문은 어떻게 실패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실패를 다룰 것인가, 혹은 실패 끝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
실패를 마주했을 때 패배감은 옆으로 밀어 두고 가만히 상황을 살펴본다면 그 잔해에는 반짝거리는 것이 잔뜩 섞여있다. 그리고 그 일에서 무엇인가를 배웠다면, 그것을 실패라고 부를 수 있을까?
브라이언 키팅,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
한 해의 끝, 이런저런 방법으로 2025년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올해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큰 키워드는 역시 '이직'이었어요. 이전 회사와 비슷한 서비스/재화를 파는데, 타깃 국가 고객이 다르고 일하는 업무 스타일, 사람들이 다르다는 것. 그리고 출퇴근 거리가 배로 늘어나고 업무량도 딴짓할 새 없이 쏟아졌어요.
3개월 차가 됐을 때 업무 강도, 스타일이 극도로 맞지 않아서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보고, 작성해야 할 문서(a.k.a 페이퍼 워크)가 많고 부실한 내용이 작성되면 리더가 하나하나 문서에 댓글을 달면서 추가 데이터 /수정을 요청하는 형태였습니다. 지금껏 만나보지 못한 마이크로 매니징 스타일에 아침마다 회사 가기 싫었던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일단 담당하고 있는 일만 끝내자… 연말까지만 버텨보자”라고 생각하면서 6개월이 흘렀습니다.
환경 적응 실패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 게 너무 안 맞다. 마이크로 매니징, 탑 다운이라는 환경은 나랑 안 맞는구나.’ 근데 시간이 지나고 다시 돌아보니 (아니 벌써 미화 됐나?) 맞든 안 맞든 다른 환경을 겪어보고 맞는지 안 맞는지 판단해 보는 것도 경험 자산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 짚어 수정, 추가 요청하는 리더를 겪어본 적이 없어서 안 맞다고 생각했구나. 아니 오히려 하나하나 짚어주는 리더는 그만큼 더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건데, 그리고 그 피드백을 나한테만 주는 것도 아니고 다른 구성원들한테까지 다 주고 있는데 내가 겪어보지 못한 환경을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던 거구나.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과 이런 스타일의 리더와 업무환경을 좀 더 주니어 때 겪어보면 훨씬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겹쳤습니다. (주니어 때 내가 너무 헐렁하게 일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이직이라는 걸 돌아봤을 때 제가 발견한 반짝임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업무 환경에서 적응해 나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의 적응통이었어요.
며칠 전 회사를 다니면서 사이드 잡으로 모임 공간을 운영하는 분께 어떻게 그렇게 두 가지 일을 해내는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체력이 안 따라와 주는 게 당연해요. 근데 하다 보니, 1년이 넘어가고 1년 반이 넘어가니까 적응되더라고요.” 뭐든지 시간이 필요한 일인데 너무 조급하게 힘들다, 체력이 달린다,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직이 실패였을까? 3개월 전에 물어봤다면 실패라고 대답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실패를 물고 늘어졌을 때, 어떻게 대응하고 의미를 부여할 것이냐 에 따라 다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이직한 회사 적응에 실패했나요? 아니요, 적응해 나가고 전에 없던 성과를 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2019년 연말에 시험 삼아해 본 프로모션이 떠올랐고, 2020년 연말에는 여기에 전력투구해 보기로 함. (…) 이 무렵 모 마케터 분의 조언이 떠올랐음. 사업하는 데는 복잡한 엑셀이나 데이터 프로그램이 필요한 게 아니고, 정말 중요한 핵심 숫자 몇 개만 대표가 매일 기록해 보면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 감이 잡힐 거라는 조언이었음. 밑져야 본전이므로, 프로모션을 시작한 12월 1일부터 나도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하나 열어 매일 숫자를 기록하기 시작했음
2~3일 정도 기록하자 바로 깨달음이 왔음. 아, 이거구나. 한 칸 한 칸 숫자를 입력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그래프를 눈으로만 확인하는 것과 뇌를 사용하는 부위부터 다른 느낌이었음. 숫자를 직접 입력하다 보니 매출과 비용, 중요한 지표들이 모두 내 손안에 잡히는 듯했고, 무슨 숫자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앞으로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도 정리되었음
박소령, 《실패를 통과하는 일》
전 퍼블리 대표이자 창업자인 박소령 님의 책 <실패를 통과하는 일>을 이번 달의 도서로 읽고 있습니다. 저 또한 퍼블리의 저자 중 한 명 이기도 하고 ‘창업 실패록’이라는 본 적 없는 주제에 홀려 망설임 없이 구매했습니다. 실패를 이렇게나 솔직하게 공개할 수 있는 용기에 감탄하며… 최근 들어 읽었던 책 중에 가장 많은 플래그를 붙이고 밑줄을 그었던 책이에요.
퍼블리는 스타트업 열풍이 불었던 2015-2016년 즈음 시작되었고 투자를 받았던 시기가 제 전 직장 시기와 겹쳐서 상황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무조건 매출, 공헌이익, 영업이익… 이익을 내는 게 첫 번째인데 그땐 트래픽을 우선 주의의 시대였죠. ‘이익이 없다면 당신의 사업은 사업이 아니다. 이익이 없으면 그것은 회사가 아니다’라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정말 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으면서 읽었지만 마케터로서 무엇보다 공감했던 문장은 “한 칸 한 칸 숫자를 입력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그래프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과 뇌를 사용하는 부위부터 다른 느낌이었음. 숫자를 직접 입력하다 보니 매출과 비용, 중요한 지표들이 모두 내 손안에 잡히는 듯했고, 무슨 숫자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앞으로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도 정리되었음"이라는 부분입니다.
최근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거든요. 전사 캠페인을 운영하면서 단순히 대시보드에 그려진 그래프를 ‘보는 것’과, 서비스 전반의 퍼널 지표를 하나하나 시트에 ‘직접 옮겨 적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습니다.
방문 전환율, PDP 전환율을 한 칸씩 채워 넣다 보면 대시보드에서는 보이지 않던 지표의 숨소리가 들리는 기분이 들어요. 어떤 시기에 수치가 떨어지는지, 어떤 지점에서 고객이 망설이는지가 훨씬 더 선명하게 뇌리에 박히더라고요. 그냥 눈으로 훑을 때는 몰랐던 서비스의 진짜 민낯을 마주하게 된 거죠.
이런 경험은 사실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주니어들에게나 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경쟁사 조사’를 제가 직접 했을 때였어요. 당시엔 “귀찮게 왜 나한테 시키지?”라며 구시렁대며 시작했지만, 막상 손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정리해 보니 기획의 실마리가 풀리고 우리 서비스의 빈틈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부분들을 구체적인 숫자로 뜯어보니 비로소 실체에 가까워진 느낌이었달까요.
마케팅은 언제나 가설과 검증의 연속입니다. 공들인 캠페인이 목표 거래액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쉽게 ‘실패했다’고 단정 짓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곤 하죠. 하지만 그 결괏값을 숫자로 뜯어보고 분석하는 과정을 거치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비록 거래액은 미달했을지 몰라도, 특정 지면의 전환율은 전월보다 올랐을 수 있습니다. 전체 매출은 적었더라도 신규 고객의 체류 시간은 늘어났을 수도 있고요. 큰 목표 달성 실패라는 거대한 바위 아래에는, 다음 성공의 씨앗이 될 ‘구체적인 레슨앤런(Lesson & Learn)’이라는 반짝이는 보석들이 분명 섞여 있습니다.
막연하게 “안 됐다”며 패배감에 젖는 대신, 숫자를 현미경 삼아 상황을 세밀하게 분해해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브라이언 키팅이 말한 ‘실패의 잔해 속에서 반짝거리는 것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올 한 해, 이직이라는 큰 변화 속에서 ‘환경 적응의 실패’와 ‘성과에 대한 압박’ 사이를 수없이 오갔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 안에서 어떤 구체적인 숫자를 남겼느냐에 따라,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했던 적응통’이자 ‘성장을 위한 데이터’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지금 무언가 실패했다고 느껴진다면, 잠시 감정은 옆으로 밀어 두고 아주 사소한 숫자, 기록부터 하나씩 써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직접 손으로 써 내려가는 그 숫자들이, 실패를 전혀 다른 의미로 다시 정의해 줄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