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잉맘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얼마 전 휴가로 싱가포르에 온 지인을 우리 집에 초대했다. 우연히 그의 소셜미디어를 보고 그가 싱가포르에 여행을 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곧바로 우리 집에 놀러 오시라고 했고, 그는 감사하게도 내 제안에 응해주었다. 3년 만에 멀고 먼 한국에서 날아온 지인이 우리 집에 오는 순간이었다. 우리 식구는 모두 들떠 있었고, 특히 내가 가장 들떠 있었다.
싱가포르에서도 일이나 모임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곤 하지만, 가끔 나와 비슷한 일을 한국에서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떤 생각을 하며 일을 하고 있을까,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 그들에게도 어려움이 있을까, 그들이 나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등등. 일과 관련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언제나 무궁무진하고,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업무 환경인 한국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궁금했다.
그는 자신감이 넘쳐나는 서른 중반의 남성이다.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잠깐 쉬는 시간이라고 했고, 전 직장에서 만든 결과가 너무나도 좋았기에 앞으로 다니게 될 회사에서 그에 대해 큰 기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커리어를 쌓아가며 수많은 고민을 한 듯했고, 많이 도전하고 깨지며 성장한 사람이었다. 그와의 대화는 흥미진진했고, 그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나에게까지 번지는 듯해서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와의 저녁 자리가 끝나고 남편과 나는 며칠 동안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길 원하는지, 어떤 자세로 우리의 일에 임하는 사람들인지,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와의 대화 중 내가 건넸던 말 한마디가 갑자기 떠올랐다.
“일하기 제일 좋은 나이가 애 낳고 키우기에도 좋은 나이더라고요.”
횟수로 직장생활 9년 차가 되던 해에 큰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언제 어떻게 낳겠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볼 겨를도 없이 생긴 아이였다. 몸속 아이가 안정기에 접어들던 12주 차부터 야근을 밥 먹듯 했다. 입덧도 없어서 회사 근처 밥집 밥은 뭐든 다 맛나게 잘도 먹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몸이 덜 무거워 혼자 국내 출장을 다니기도 했다. 예정일 일주일 전, 마지막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이를 낳고 신생아를 키우는 게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모를 때였으니 그저 일을 못한다는 아쉬움, 내가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세상과 동떨어지게 될 거라는 생각, 육아휴직 기간 동안 세상 속도를 내가 못 따라가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참 일하기 좋은 나이였다. 며칠 야근을 해도 토요일 하루 푹 자면 일요일에 데이트하러 나갈 수 있는 체력이 되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복잡한 일을 해결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재미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일을 하면서 만난 사람이 모두 좋을 수는 없지만 인복이 있어서였는지 어디를 가나 좋은 사람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는 시기였다.
이렇게 체력이 좋은 시절이었으니 건강하고 무탈하게 아이를 낳았고, 밤잠을 잘 이루지 못하면서도 갓난아이를 밤새 돌볼 수 있었고, 우유와 달걀 등 각종 식품 알레르기가 심각한 아이를 위해 공부까지 해가며 이유식을 만들어 먹일 수 있었다.
그리고 점점 나는 작아졌다. 나는 회사에 돌아가서 예전처럼 일을 할 수 있을까,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보다 일을 좋아하는 마음이 크면 그건 나쁜 엄마가 되는 것일까, 아이와 일 중 하나만 선택하지 않고 둘 다 신경 쓰다가 결국은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때, 결혼과 출산과 양육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세상 부러울 게 없는 고액 연봉의 직장인으로 승승장구하거나, 획기적인 창업 아이템을 떠올려 내 힘으로 사업가의 길을 걷거나, 너도 나도 같이 일하자고 요청하는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었을까?
그럼 일과 동시에 결혼과 출산과 양육을 하면서 무엇을 얻었고 잃었을까? 그것이 과연 결혼과 출산과 양육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혹은 결혼과 출산과 양육을 하면서도 다 할 수 있는 사람은 해낸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만약 그때 결혼과 출산과 양육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십오 년 후 살고 싶어 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세상 모든 여성과 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한 다짐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