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주어진 10분

그로잉맘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

by 아멜리 Amelie

최근에 꽤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일이 많아서 새벽부터 이메일을 체크하는 일도 잦아지고, 밤늦도록 제안서를 쓰는 날도 늘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일에 치여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거나 아이들을 귀찮아하는 횟수도 정비례로 늘기 때문이다.


큰아이는 시내버스를 타고 등교를 한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나와 함께 버스를 타고 학교까지 가서 아이가 학교 정문을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혼자 돌아왔는데, 아이가 용기를 내어 혼자 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겠다고 한 날부터 버스 정류장까지만 동행한다. 아이와 등교를 하며 30분 정도의 시간을 보냈는데 요즘 우리는 10분 가량 함께하게 되었다. 집을 나와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어가 잠깐 버스를 기다리는 10분.


어느 날 아침이었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을 향하는 길에 오후에 있을 아이의 일정을 몇 가지 공유했다.


“학교를 다녀와서 간식을 먹고 나면 중국어 선생님께서 오실 거야. 중국어 수업하고 나면 엄마랑 한글 공부를 조금 하자. 지난번에 우리 치과가느라 한글 공부 못 했잖아. 조금씩 하는 것도 계속 미루면 나중에 산 덩이만큼 커져서 다시 하기가 힘들어져. 조금씩 꾸준히 하는 거야. 알았지? 저녁 먹고 비가 안 오면 잠깐 산책하러 나가도 되고, 아니면 집에서 좀 쉬다가 자자. 알겠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는 푸념을 늘어놨다.


“중국어를 학교에서도 배우는데 왜 집에서 또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너무 어려워서 하기 싫어. 그리고 한글도 너무 어려워서 하기 싫어. 이제 한글 읽을 수 있는데 왜 자꾸 공부를 해야 하는 거야? 학교에서 계속 공부하고 집에 오는데 왜 자꾸 뭘 더 배워야 하는 거야? 나는 놀아야 하는데 놀 시간이 없어.”


아이가 하는 말을 모두 듣고 보니 나는 아이가 오후 시간에 ‘해야 하는 것’만 전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아이의 비서라도 되는 마냥 아이의 오후 일정을 공유한 셈이었다. 버스정류장을 향하는 10분 동안 왜 중국어와 한글 공부를 추가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하고 아이를 버스에 태워 보낸 날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10분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그 10분은 어떤 시간일까? 엄마와 헤어지면 홀로 세상을 향해 걸어가기 직전의 시간, 오롯이 혼자 자신의 생활을 만들어나가는 학교라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시간, 스스로 만들고 유지해나가는 인간관계인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시간이었다. 마치 떠나는 도시라 할 수 없고 도착한 도시라 할 수 없는 공항에 머무는 듯한 시간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 10분이었다.


우리의 10분을 굳이 어떤 식으로 채우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우진 않았다. 다만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양육자의 모습 중 ‘비서’처럼 아이의 스케줄 관리에만 심혈을 기울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이의 스케줄은 곧 아이 스스로 관리하게 될 아이의 몫이기 때문이었다.


아침 7시 40분, 아파트 대문을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면서 맨 먼저 하늘을 바라보고 우리는 대화를 시작한다.


“하은아, 밤새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하늘이 더 깨끗해 보인다. 나는 싱가포르의 구름을 참 좋아해. 어떤 날은 구름이 새털 같고, 어떤 날은 커다란 솜사탕처럼 보여, 손을 뻗어 만지면 진짜 보드랍고 포근할 것 같아. 오늘은 구름이 더 이뻐 보이네. 하은이는 오늘 아침 기분이 어때?”


아이는 기분이 좋다는 말을 시작으로 전날 나에게 못 다했던 이야기를 하거나, 불현듯 생각난 학교 일상이나 친구 이야기를 해준다. 땅에 떨어진 꽃잎을 줍기도 하고 꽃잎 색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곱셈 문제를 내고 맞히는 게임을 하기도 하고, 끝말잇기를 하기도 한다. 동시 외우기 숙제가 있었던 날은 같이 동시를 외우기도 하고, 쪽지 시험이 있는 날은 쪽지 시험에 나올만한 내용을 묻고 답하기도 한다. 가끔 아이는 나의 하루 일정을 물어보기도 하고, 아이가 하고 싶은 놀이를 알려주기도 한다.


우리의 짧은 대화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는 순간이 가끔 있는데 그럴 때면 아이는 맑은 미소로 나를 바라보고, 나의 오른손을 쥐고 있는 제 왼손에 살짝 힘을 준다. 말로 모두 표현할 수 없는 만족감, 애정, 다정함이 우리 둘 사이를 오가는 순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10분은 무지개색만큼 다채로워졌다. 언젠가 아이가 훌쩍 자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줄 일이 없어지고, 아이가 더 멀리 제 길을 찾아 떠나고 나면 우리에게 주어졌던 10분이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다.


하루 단 10분, 그동안 우리가 맞잡은 두 손에 마음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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