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엿한 미국 코숏으로 거듭난 그녀
13시간 비행 후 겨우 도착한 애틀란타는 꽤 가혹했다.
사실 미국까지만 잘 오고 나면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었던 게 큰 착각이었다. 미국 내 환승이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보안검색대에서 곧바로 첫 난관을 만났다.
이동장에서 구찌를 꺼내야 한다는 주문을 받았다. 고양이가 가방에서 도망칠 수도 있고 다시 이동장에 넣는 게 매우 힘이 들 수 있다고 열심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봤지만, 가방을 X-ray 검사를 해야 해서 어쩔 수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대신, 밀폐된 공간에서 고양이를 꺼낼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면서 갑자기 직원들끼리 모여서 고양이 좋아하는 사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말이 물색이지 ’자, 누가 들어갈래?‘ 라며 차출하는 느낌이었다.
Who likes cat?~
직원들끼리 웃으면서 서로 들어가라고 떠미는 동안, 나는 엄청 심각했다. 보안검색대 한편에 마련된 밀폐된 방에 들어가서 잠시 대기하고 있었더니, 곧 상의를 마치고 선발(?)된 직원 두 명이 야무지게 라텍스 장갑을 끼고 비장하게 방으로 들어왔다. 제발 난리를 피우지 않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가방 지퍼를 열었는데 구찌가 의외로 차분했다. 너무 겁을 먹어서 오히려 도망칠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느낌이어서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꺼냈다. 직원이 바로 고양이 가방을 가지고 나가서 보안 검색을 마치고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가방을 돌려주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모두 방을 나갔다.
그새 구찌는 바닥에 거의 눌어붙은 포복 자세로 찬찬히 방을 훑어보기 시작했고, 긴장이 서서히 풀릴 무렵에 얼른 안아서 가방에 다시 넣었다. 원래의 구찌였으면 가방에 다시 들어가기 싫어서 닭발처럼 발가락을 쫙 벌리고 하늘다람쥐 자세로 엄청 버텼을 텐데, 예상외로 순순히 다시 가방에 입장해 주셔서(?) 그저 감사했다.
두 번째 난관은 보안 검색대에서 핸드폰과 노트북을 두고서 환승 구역으로 나와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구찌를 가방에서 꺼냈다가 다시 넣는 게 너무나도 큰 일이었는데 무사히 마치고 나니까 긴장이 확 풀려버려서 그랬던 것 같다. 엑스레이 검사 때문에 가방에서 따로 꺼내 둔 전자기기들을 그대로 바구니에 두고 캐리어만 홀랑 가지고 나와버렸다.
알다시피 보안 구역을 통과한 이후에는 다시 거슬러서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환승 구역을 찾기 위해 휴대전화를 꺼내려고 하다가 보안 검색대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다시 들어가려고 몸을 틀자마자 세관 직원이 강력하게 저지했다. 휴대전화를 두고 나왔다고 절절하게 호소했더니 엄청 미심쩍게 쳐다보면서 휴대폰 기종이 뭔지 색깔이 뭔지 꼬치꼬치 캐묻고는 기다리라고 하면서 대신 들어가서 확인해 주겠다고 했다. 곧 직원이 약간은 한심한 표정으로 이쪽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직원이 나를 한심하게 보는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휴대전화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어서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노트북까지 두고 온 것은 나중에 바구니를 보고 난 후에야 알았다. 노트북이 내 것이 맞는지 또 한차례 의심을 하던 직원은 약간 우리네 엄마처럼(?) 어떻게 노트북까지 두고 오면서 그걸 기억을 못 하냐면서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Thank you so much:)!!!!!!”
’잔소리 들으면 어떻고 한심하게 쳐다보면 어때.
내 물건 잘 찾아서 나는 환승하러 가련다. 당분간 안 올 곳인데 뭐 어쩔거야.‘
세 번째 난관은 환승구역으로 가는 공항 내 지하철을 탔을 때였다. 사실 세 번째 난관은 앞선 것들에 비해 매우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해프닝 정도였다. 핸드폰도 무사히 찾았겠다, 구찌도 가방에 다시 잘 들어갔겠다, 이제 남은 건 무사히 환승 게이트로 가서 좀 쉬다가 비행기를 타면 끝이라는 마음에 진짜 기뻤었는데…
지하철도가 그렇게 빠를 줄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다. 우주선 가방을 앞으로 메고 캐리어를 한쪽에 기대어 둔 채 휴대폰을 보려던 순간, 갑자기 캐리어가 샤라락 굴러서 지하철 끄트머리까지 노룩패스로 이동해 버렸다. 같은 철도 칸 반대편 끝에 서 있던 외국인 커플이 다행히 캐리어를 잡아서 멈춰주었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멈춰줬다기보다는 부딪히기 전에 캐리어를 막아낸 것과 거의 흡사했다. 이미 나는 멘탈이 나가서 해탈을 한 상태였기에 실없는 웃음과 함께 터덜터덜 걸어가서 캐리어를 다시 받아올 뿐이었다.
마지막 난관은 진짜 눈물이 날 정도로 아찔했던 비행기 지연 문제였다. 미국 내 환승은 델타항공이었고 워낙 지연 문제로 유명하긴 했지만, 실제로 비행기 지연을 거의 겪어보지 않은 자칭 럭키걸(?)은 남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기체 결함 문제로 총 세 시간이나 지연됐고, 심지어 이륙 준비까지 다 마친 상태에서 다시 비행기에서 우르르 내려서 다른 게이트에 있는 다른 비행기를 타느라 시간을 엄청 허비했다.
이게 진짜 왜 최악이었냐면, 우주선 가방의 경우 기내 좌석 아래에 두기 위해서는 가로로 눕혀야 했는데 이때 구찌가 진짜 스트레스를 받았다. 바닥에 눕혀서 두면 한동안 발버둥을 치는데 진정되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처음에 기체 결함이 있던 비행기를 탔을 때에는 그래도 이렇게 눕히는 게 처음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탈 때 이후로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겠거니 싶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내선 한 시간 반이 안 되는 비행 거리였음에도 기내 결함 문제로 비행기에 탑승한 상태로 한 시간이 넘게 모든 승객들이 대기를 하게 되었다. 다들 지연된 것에 대해서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예민해지는 와중에 구찌는 그 조용한 비행기 안에서 빽빽 울어대고 난리를 쳐서 그 비행기를 탄 승객들 중에서 고양이가 탑승한 것을 모르는 승객은 아마도 없었을 거다. 미국에 올 때 탔던 비행기는 3-4-3으로 크기도 크고 비행 중 소음이 있어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면, 델타 환승 비행기는 3-3 좌석의 작은 비행기였고 비행기 소음도 하나도 없는 그저 고요한 상태였기에 아무리 담요를 덮어서 소리를 줄여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함 덕분에(?) 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고양이 가방을 좌석 아래에서 꺼내서 다른 비행기 좌석 바닥으로 내려놓는 과정‘이 한 번 더 추가가 되어서 안 그래도 폭발 직전인 구찌를 더욱더 힘들게 만들었다. 이때는 이미 출발한 지 20시간 정도가 지난 후여서 정말 사력을 다해서 마지막 탈출을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게 너무나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델타에서 비행기 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구찌가 아직도 가방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잠깐 분노하기도 했다. 점검만 제대로 했으면 이미 미국 집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으니까.
착륙할 즈음에 구찌는 이미 목소리도 거의 안 나오는 상태로 완전히 지쳐서 움직임도 현저히 적어졌다. 주인을 잘못 만나서 예상치도 못했던 장거리 비행을 하게 되었고,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까딱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무섭고 아찔했다. 최대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빠르게 비행기에서 내려서 짐을 찾고 남편이 마중 나온 자동차까지 달려가는 것뿐이었다. 미리 바꿔둔 유심으로 애틀란타에서부터 실시간으로 남편에게 연락을 했고, 남편은 고양이 화장실을 자동차에 싣고 최대한 가까운 곳에 마중 나와 있기로 했다. 착륙하고 사람들이 서서히 일어나는 동안 최대한 몇 발자국이라도 더 앞으로 가서 빨리 나오려고 노력했고, 다행히 주변 사람들이 고양이 때문인걸 아는지 잘 이해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내 표정이 이미 울상이었고 엄청 다급하게 발을 동동 구르고 있어서 비켜준 것 같기도 하다.
너무 빨리 짐 찾는 곳으로 와버려서일까 아직 짐이 나오지도 않고 있었다. 다행히 남편이 가까운 곳에 주차를 하고 입국장 짐 찾는 곳까지 잘 찾아와 줘서 이동장을 빠르게 넘겨주었다. 손발이 아주 착착 맞았다. 남편이랑 거의 한 달 만에 만난 건데 애틋한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얼른 구찌를 차에 데려가서 화장실을 가게 해주는 것이 우리 둘의 공통 목표였다. 남편에게 구찌를 넘겨주고 나서야 짐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짐을 찾아서 차로 갔더니 구찌는 이미 시원하게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난 후 아예 화장실에 자리를 잡고 쉬고 있었다. 죽지 않고 잘 살아있어 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뚜껑이 덮인 큰 화장실에 입구 부분도 담요를 살포시 덮어줘서 그런지 생각보다 금방 안정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미국 집에 와서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곳저곳을 아주 샅샅이 살폈다. 새로운 공간에 대해 다 파악을 해야 안심하고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탐색을 마친 이후에는 한국에서부터 쓰던 익숙한 베개 위에 웅크리고 쓰러지듯 잠들었다.
너무 오랜만에 한 장거리 비행인 데다가 고양이를 데려오는 건 정말 신경 쓸 것이 많다 보니 나도 거의 기절하듯이 잠들었던 미국에서의 첫날.
당일에는 그저 잘 살아서 왔다는 사실에 감사했고 너무 피곤해서 잘 몰랐다. 이동장에서 구찌를 꺼내다가 그저 평소에 엄청 좋아하던 동결북어트릿을 하나도 먹지 않았을 정도로 힘들었다는 것만 알았는데, 다음날 아침에 구찌를 살펴보니까 이동장 안에서 탈출하려고 안간힘을 쓴 탓에 발톱도 다 깨져있고, 콧등이 많이 쓸려서 피가 맺혀있었다.
‘애기가 엄마아빠를 잘못 만나서 고생이 너무 많았어. 진짜 이 정도로 힘들어할 줄 알았다면 훨씬 더 진지하게 데려 올지 말지 고민을 했었을 텐데, 평소에 구찌가 워낙 무던하고 그래서 잘해줄 거라고 그저 안일하게 생각해서 미안해.
얼른 상처도 다 낫고 새로운 집에 적응해서 행복하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도록 최선을 다해 보살펴줄게!’
세 달이 넘게 흐른 지금, 코리안 숏헤어 구찌는 어엿한 미국 고양이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