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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강 Nov 23. 2020

사랑하는 할머니께

하늘에 보내는 편지

 할머니. 저는 아직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걸 못 믿고 살아요.


 중학교 1학년, 시험을 볼 일이 있던 토요일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아빠의 배웅을 받으며 나올 때 엄마는 할머니 간병하러 일찍 병원에 갔다는 말을 듣고 그렇구나, 했어요. 시험 잘 보고 오라는 응원에 긴장으로 차가운 손을 비비며 걸음을 딛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떨렸지만 최선을 다한 시험이 끝나자 결과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어요. 신이 나서 언덕길을 내려오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장례식장으로 오라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있던 뒤로 정신을 차려 보니 검은 상복을 입은 엄마가 울고 있었습니다. 사실 새벽에 돌아가셨지만, 진짜할머니는 네가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마음이 흔들리는 걸 바라지 않으셨을 거라고 생각해서 시험 전에 얘기하지 않았다는 엄마의 말을 들었는데도 마냥 멍했어요. 어리다고 발인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저는 할머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사흘 내내 울지 못했습니다. 그게 지금도 마음에 남아서, 눈물도 흘리지 않은 손주였던 게 너무 죄송해서 이렇게 편지를 써요.


이제 몇 살만 더 먹으면 저는 엄마가 저를 낳은 나이가 됩니다. 할머니의 하나뿐인 강아지는 취업을 걱정하고 스스로의 방향을 정할 수 있을 만큼 자랐습니다. 생일이 스무 번 넘게 지났어도 저는 아직 길을 잃은 것만 같은데, 저를 낳은 엄마는 얼마나 더 막막했을지 생각하면 늘 감사해요. 젊은 연인이 신혼부부를 지나 갓난아이의 부모가 되었을 때 엄마는 일을 그만둘 수 없어 무릎이 아픈 할머니 앞에서 저를 맡아달라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진짜할머니라는 애칭 뒤에 나를 키워주신 진짜 할머니라는 뜻이 있었다는 것을 저는 너무 늦게 알았어요. 할머니, 엄마는 할머니께서 다정한 엄마는 아니었다고 고백했을 때에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불 꺼진 방의 어둠 속에서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으면 어서 자라고 눈가를 꼬집는 주름진 손길마저 항상 사랑으로 견고했는데.


엄마도 걱정돼서 그랬겠지만 고등학교 때는 정말 가족마저 내 편이 아닌 것 같아 얼마나 서러웠는지. 계단에 숨어 울음을 삼킬 때 할머니 생각이 어찌나 간절하던지. 할머니 품에 엉엉 울며 달려들어 안기면 지금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할머니 냄새가 숨을 가득 채울 텐데. 엄마에게 너는 왜 그렇게 애를 잡냐, 하고 한소리 해줄 사람은 세상천지에 할머니밖에 없는데. 예전에는 할머니를 뵈러 가면 맛있는 것을 먹고 한껏 어리광을 부린다는 친구들을 보며 부러워할 때 진짜할머니 생각이 그렇게 났었어요. 4살부터는 부모님의 돌봄을 받고 자라서, 막상 할머니를 뵐 때는 예의바르게 있으라는 엄마의 말만 듣고 의젓하게 행동했으니 저는 할머니께 부릴 평생 치 어리광을 마음에 쌓아두고만 있습니다.


지금은 삶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할머니 생각이 간절해요. 나를 가장 사랑해줄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보다, 엄마의 엄마가 아닌 나의 진짜할머니가 어떤 분인지 평생 더는 알 수 없다는 게.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제가 백발이 될 때까지도 중학교 1학년에 멈춰 있을 거라는 게 너무 슬퍼요. 이제 어른이 된 저는 할머니가 바라보는 삶이 어떤지,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무엇인지, 어려움을 겪을 때는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지가 궁금합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제 손을 잡고 대답해줄 할머니가 계시지 않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할머니의 빈자리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도 항상 고운 옷을 입으시고 화장품은 좋아하는 브랜드가 확실하시던 내 사랑하는 진짜할머니. 아직도 보라색 모자를 쓰고 길을 걷는 할머니를 보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는 저를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신가요? 저는 8년이 지나고 이 편지를 쓰는 지금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돌아가신 당신 생각에 울었습니다. 아직도 할머니 제사는 그저 의미 없는 의식처럼 느껴지고 할머니를 뵙지 못하는 건 바쁜 제 불효 탓인 것만 같은데, 이렇게 저는 또 조금씩 할머니를 더 깊이 그리워해요.


언제나 제 성공을 누구보다 기뻐하신 할머니. 매번 스스로가 성장할 때마다 할머니라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온 동네에 자랑하실 것을 알기에 저는 제 자신에게 조금 더 당당해집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할머니를 다시 만날 때 저는 하늘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손주가 될 테니까, 지금 맞이하는 매 순간 저는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게요.     


할머니의 멋진 손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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