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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혜 Nov 18. 2020

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 - 정세랑 조르다노 대담(펌)

팬데믹, 기후변화, 환경, 공동체, 연결성, 확장하는 사랑, 어려운 낙관

앞의 기조강연에서 이어지는 정세랑 작가와 파올로 조르다노 작가의 대담입니다. 캡처 화면 아래에 대담 텍스트와 영상 링크가 있습니다 (캡처에는 빠진 부분도 있어요). 




파올로 조르다노 Paolo Giordano: 네, 지금은 매우 중요한 시점입니다. 비단 팬데믹뿐만은 아닙니다. 


팬데믹, 즉 이번 위기와 환경 위기 사이의 관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지금도 충분히 힘들다고, 그러니까 너무 많은 문제를 한꺼번에 논의하거나 다루지 말자고 하기 쉽습니다. 이 문제가 당장 눈앞에 있으니 환경 문제는 잠시 미뤄두자고 말이죠. 저는 그렇게 될까 두렵습니다. 팬데믹이 결국 환경문제에 유익한 영향을 주지 못하고, (환경문제에 대한) 정치적 노력과 팬데믹 전에 보이던 점진적 인식의 확산이 멎어버릴까 걱정입니다. 


그런데 이 두 문제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팬데믹 문제는 환경문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아니, 그냥 관계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환경문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번 팬데믹과 과거 그리고 미래의 팬데믹들은,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생길 것이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우리가 사는 방식, 소비하는 방식, 먹는 방식, 우리 주위의 생태계와 동물들을 대하는 방식, 벌목 등 우리가 흔히 ‘환경문제’라고 부르는 모든 문제들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이 시기에 우리가 환경주의로부터 멀어지게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문제를 연결해서 인식하자는 취지의 모든 발언, 의견과 권유를 환영합니다. 우리가 이번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더 큰 규모의 환경 시험도 통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엄청난 파괴가 초래될 것입니다. 작가님의 기조강연에서 제가 얻은 바를 말씀드렸는데, 이러한 작가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많이 두렵고 지칠 때일수록,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이해합니다만, 생계와 현재 상황에 대해서 걱정이 커지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작가, 지성인, 과학자들은 이러한 응급상황 속에서도 보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내다보는 것이 필요함을 주장해야 할 것입니다. 




정세랑: 기조강연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우리 세대가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에 대해서, 물론 바로 곁에 닥친 위기 때문에 그 점을 생각하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우리가 미래 세대를 착취하는 세대로 기록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마음이 있어요. 미래 세대가 가져야 할 자원 혹은 환경 혹은 가능성들을 다 끌어와서 지금 써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에 눈앞의 위기에 대처하면서도 한걸음 떨어졌을 때 우리가 빼앗아 오는 착취자들이 되지는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아이가 있으신 분들은 아이를 떠올리실 거고, 저 같은 경우는 조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굉장히 하거든요. 


내가 죽는 날까지 세계가 점점 천천히 나빠질 수도 있고, 또 급격하게 나빠질 수도 있는데 조카들이 수명이 끝날 때까지 생각하면 더 마음이 어두워지는 거예요. 다음 세대가 바로 곁에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어린이들 혹은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서 우리가 모든 걸 뺏어 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 분명해지는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파올로 조르다노: 이 상황은 일생일대의 새로운 현상들을 가져왔습니다. 새로운 것은 바이러스와 일상적인 행동의 제약만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등장한 큰 변화는 바로 관점의 변화입니다. 정 작가님이 관점, 시선과 관련하여 말씀하신 내용에 저도 공감합니다. 미래 세대의 관점에서 기후 문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효과적으로 이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접근이라고 봅니다. 


그것에 더하여 현재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관점이 또 있습니다. 바로 개인의 관점이 아닌, 보다 큰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관점입니다. 이것이 팬데믹이 우리 삶에 가져온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현대문명에서 자라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외부 세계에, 우리의 공동체에 기여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각자 자신의 길, 욕망, 소유를 추구하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이러한 통념을 뒤바꿔 놓았습니다. 이제 우리 각자의 행위는 우리 자신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내가 마스크를 쓸지 여부, 오늘 밤에 10명을 집으로 초대할 지 둘만 초대할 지는 더 이상 나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그것은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를 보호하느냐 보호하지 않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개인의 책임의 범위가 갑자기 훨씬 커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과거와는 크게 다른 사고방식입니다. 


이 점을 많이 강조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전에 살던 세상과는 다르다고 가르쳐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고 하지 않는지는 각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넘어 우리 주위의 모두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것이 공동체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의 도약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것에 성공하면 기후 위기에 잘 준비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세랑: 방금 조르다노 작가님이 말씀하신 이야기를 저는 조금 다른 단어들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저는 한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인류의 자아가 너무 비대하게 커졌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세상의 주인이고, 내가 이 모든 것을 쓸 수 있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다 차지하겠다’ 이런 개인적인 수준에서도 인류의 수준에서도 자아가 너무 비대해졌던 거예요. 맞지 않는 공간에 있는 거대한 고래나 코끼리처럼 커졌던 것 같은데. 


21세기는 이 지나치게 커다래진 자아를 적당한 크기로 줄이는 세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연결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나의 자아가, 나의 지나치게 거대해진 욕망이 다른 것들을 해치지 않나 검토해보는 그런 과정이기 때문에 이 자아의 크기에 대해서 요즘 재미있게 생각하고 있는 편이고요. 


그리고 또 한편 연결성은 사람들끼리의 특히 연결성 같은 경우에는 어떤 새로운 생각, 좋은 생각들을 퍼져나가게 하기에는 되게 좋은 도구인데, 동시에 나만의 생각을 가지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의견을 의탁해버리는 경우가 많이 생기는 것 같아요. 특히 인터넷에서 빠르게 여러가지 의견들이 교환될 때. 그럴 때 어떻게 또 지나치게 자아를 축소시키지 않고, 그러나 나만의 세계관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역시 또 같이 고민해야 된다는 점에서 좀 이중적으로 자아의 크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확장하는 사랑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는데요. 그 사랑의 어떤 본질이 번지는 것에 있다고 평소에 자주 생각하고 이야기도 해왔는데. 닮지 않은 것을 사랑하게 되는게 가장 멋진 것 같아요. 처음에는 나의 가족, 나의 가까운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에게까지 마음을 주고 그것이 또 동식물에게 넓어지고, 이런 큰 확장이 생각보다 놀랍게도 자주 일어나는 편이라서. 


그런 사랑의 특성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는데, 또 한편으로는 그게 그런 종류의 사랑은 호기심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것이 다른 이름 두개를 가진 하나의 마음이 아닐까라고 생각을 해서 어떤 멀리 있는 것, 내가 잘 접해보지 못 했던 것, 평소에 신경 쓰지 않았던 것에 대해 가지는 호기심과 관심이 사실은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을 요새 들어 특히 자주 했습니다. 


파올로 조르다노: 정세랑 작가님이 방금 쓰신 ‘확장되는 사랑’이라는 표현이 참 아름답고 또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와 유사하게 살짝 다른 단어들로 이 개념을 표현하곤 합니다. 제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를 중심으로 하나의 공감의 반경이 그려진 것을 상상했습니다. 각 사람마다 그 주위에 공감의 범위를 나타내는 하나의 반경, 혹은 원이 있고 그 크기가 각자 다르다고 상상했어요. 중요한 것은 그 크기가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글쓰기가,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독서가 이 공감의 원을 키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글을 쓸 때는 언제나··· 사실, 작가들은 늘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이번 책 혹은 소설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으셨나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메시지는 없습니다. 저는 절대 어떤 메시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정치인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저는 이 공감의 원을 생각합니다. 제가 쓰고 있는 작품이, 제가 상상력을 동원해 그리고 있는 이야기가 이 공감의 원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지를 생각합니다. 우리의 공감의 원을 더 확장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절실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세상이 나날이 양극화되고 있기 때문에 이 과제는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소셜미디어에 대해서 10년 전의 우리는 매우 순진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물론 여전히 그렇지만 그 때는 더 나이브 했었죠. 우리는 소셜미디어가외부 세계에 대해 더 열린 마음을 갖도록 해줄 것이라고, 더··· 영어로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의견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포용력을 키워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소셜미디어가 사람들을 더욱 대립시키고,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과 무리를 이루고 그 경계 안에 스스로를 가두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우리는 그러한 경계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문학을 통해서, 다양한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경계를 무너뜨리고 타인과 만나도록 해줘야 합니다. 각자의 공감의 범위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로 한정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앞서 얘기한 ‘상상력의 도약’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지요. 독자로서의 저는 저와 비슷한 사람들에 대해서 읽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저는 저와 매우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읽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 대해 읽고 싶어합니다. 저는 타인의 입장에 서 보고 싶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글읽기와 글쓰기가 지향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것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손미나: 정세랑 작가님 작품 중에서 <목소리를 드릴게요> 단편들을 보면, SF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사실 형식이 SF라서 그렇지 인간, 자연, 윤리, 사랑 이런 보편적인, 원론적인 사유들이 돋보이거든요. 이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한데요. 


정세랑: 저는 늘 보편적인 이야기를 특수하게 표현하고 싶어하는 작가인 것 같아요. 사실 언제나 들었던 이야기고, 모두가 하는 이야기이지만 그럼에도 작가마다 표현할 수 있는게 다르기 때문에, 같은 주제를 써도 다 다른 작품들이 나오는 것 같고, 제가 궁극적으로 그런 보편적인 윤리나 이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가 어려운 낙관을 믿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쉬운 낙관 같은 경우는 거짓말이 될 것이고 아주 곧바로 절망을 택한 것 역시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책임한 선택일 텐데,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똑바로 보고싶어 하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어려운 낙관을 이야기 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주 이상적인 세계에 대해서 쓰는 것 역시 그렇게 멀리 한번 가보면 한 걸음이라도 그런 세계를 지금 현실로 가까이 끌어당기게 되지 않나, 문학은 아주 약하면서도 강하기 때문에 그런 면에 대해서 지향점을 굉장히 분명히 가지고 쓰고 있습니다. 


손미나: 이번에는 정세랑 작가님께 질문을 드릴게요. <목소리를 드릴게요> 소설 전반에 걸쳐서 환경 문제, 여성 문제, 교육 문제 이런 사회적인 문제 의식이 많이 드러나는데, 이런 강렬한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아주 유쾌하고 다정하고 아주 따뜻한 느낌을 품고 있어요. 과연 이 날카로운 비판조차 결 곱게 다듬었다는 해설하고도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면은 정세랑 작가님의 어디에서부터 배경이 되어 나오는 걸까요? 


정세랑: 예를 들면, 작가들이 다 하고싶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그것들을 어떻게 스며들게하는가의 문제인 것 같아요. 조르다노 작가님이 <소수의 고독>을 쓰셨을 때, 그야말로 근원적인 어떤 고독감에 대해 쓰신 것 같은데 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너무 잘 스며드는 이야기라, 사실 되게 어려운 주제인데도 이 인물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며칠 동안 그 감정에 빠지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잖아요. 그런 작업을 되게 몰입해서 정교하게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비슷한 고민들을 계속 하고 있는데 아주 큰 주제들을 다루고 싶기 때문에 소화가 잘되고 흡수가 잘되는 이야기, 친근한 인물들과 현실에서 조금 미끄러지는 방식으로 진입을 하는 것 같아요. 소설에 대해서. 저는 맥주 회사들이 목넘김이 좋은 맥주를 만들기 위해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하듯이, 소설가들도 흡수가 잘 되는 이야기를 어떻게 더 잘 스며드는 이야기를 쓸까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정세랑: (파올로 조르다노 작가에게 질문) 하나는, 질문이 늘 있는 것 같아요. 되게 근원적인 질문이 있어서, 작가들이 어떤 작품을 쓸 때도 다시 돌아가는 원점 같은 질문이 각자 작가마다 있는 것 같은데요. 저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 안에 있는 폭력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왜 인류는 폭력적일까?’ 이게 저의 질문이라면, 파올로 조르다노 작가님의 근원적인 질문은 어떤 건지 여쭤보고 싶고, 두 번째로는 책 이란게 굉장히 폭발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아주 아주 빠른 현대 사회에서 되게 느린 매체인 것 같아요. 매체가 가지고 있는 느림과 세계의 변화 속도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으시는지 그걸 여쭤보고 싶습니다. 


파올로 조르다노: 정말 중요한 질문 해주셨습니다. 특히 폭력성이 작가님의 중심 주제라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저 역시 인간의 폭력성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는데요. 작가님과는 접근 방식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이 접근 방식의 차이가 결국 작가가 어떤 유형의 소설을 쓰느냐를 결정할 텐데요. 공상과학 (SF) 소설은 미래를 내다보려 하는 반면, 제 글은 과거와 현재에 더 주목합니다. 따라서 제가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이 작가님과는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 


즉 제가 글을 통해 묻는 질문은 우리가 일상 생활과 행동에서 자행하는 폭력성이 얼만큼 심각한지 인식하는가 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양식에 끊임없이 발현되는 모호성, 양면성을 인식하는가입니다.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양면성을 의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양면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예컨대 선과 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늘 돌아오게 되는 핵심 주제는 항상 선 속에서 악을 찾을 수 있고 악함 속에 또 선함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작가의 일에서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죠. 아까 작가의 글을 마치 목 넘김이 부드러운 맥주처럼 만드는 것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 정말 멋졌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제가 소설에서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또 말씀하신 것처럼 책은 이 급변하는 시대에 아주 속도가 느린 매체입니다. 하지만 작가로서 이 상황을 그저 회피해서는 안되고 직면하여 해결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단순 명료하고 가독성 있는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그런 글을 쓰는 데 저는 작업의 상당 부분을 할애합니다. 왜냐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지만 단순 명료하게 쓰는 것은 정말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쉽고 단순한 글을 쓰고자 하고, 어떻게 보면 이를 위해 과학에서 배운 것을 활용합니다. 과학은 항상 가장 단순한 해답, 아이디어 혹은 명제를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한 가장 단순하고 간결한 결론을 찾으려 하죠. 저도 문학에서도 그렇게 하려고 하는데 노력을 정말 많이 들여야 하는 일입니다. 정 작가님도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파올로 조르다노: (정세랑 작가에게 질문) 제게 주신 질문을 그대로 다시 여쭤보고 싶습니다. 단순하고 명료한 글을 쓰기 위해 정 작가님은 어떻게 하시는지요? 작가님의 비결이 궁금합니다. 작가님의 좋은 비결을 제가 훔쳐서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들은 항상 다른 작가의 글을 쓰는 방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훔치거든요. 


그리고 다음으로는 지금의 현실과 더 관련이 있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은 이번 팬데믹에 대응하는 방식이 이탈리아와 유럽과는 다소 달랐지요. 여기처럼 강력한 전면 봉쇄조치는 없었지만 한국 나름의 이동 제한이 있었죠. 많은 동료 작가들이 말하기를 각 개인 모두가 힘든 시기였지만 특히 창작활동에도 어려움이 많았다고들 합니다. 저 역시 몇 주간은 소설을 읽을 수도 없었고 몇 달 간은 소설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 작가님께 지난 몇 달 간 글을 쓰실만 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어쩌면 미래 상황,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보다 익숙하셔서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이 시기를 보내셨을까요. 꼭 알고 싶습니다. 


정세랑: 일단 저는 어떻게 하면 속도를 따라잡으면서 말씀하신대로 어떻게 간결하게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를 두고 장편과 단편에서 다른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장편 같은 경우에는 정말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 쓰기 때문에, 그야말로 픽션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다 읽고 흡수할 수 있는 표현과 주제로 쓰는 반면, 단편 같은 경우에는 좀 더 실험적으로 쓰는 것 같아요. 이것은 이해 받지 않아도 좋다라는 마음으로 쓰는 단편들이 분명히 있고 그렇게 해서 저의 욕구를 해소하면서도 소설이 대화가 될 수 있게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정말 저도 픽션을 읽는게 쉽지 않은 해였는데, 그럼에도 저는 저만의 작품을 쓰는 속도를 좀 줄이긴 했지만 대신 다른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은 더 늘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격리되어 있는 분들이 즐길 수 있는 컨텐츠들을 만들기 위해 직접 만나진 않지만 일러스트레이터분들과 제 이야기를 합치고, 배우 분이 낭독해주시거나 하는 것들을 각자의 작업실에서 하는 과정을 거쳤거든요. 


아직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아 내가 정말 사람을 좋아했고 다른 영역의 아티스트를 만나고 싶었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해였기도 하고, 또 굉장한 애도 속에 있어서 창작을 못했을 것이라 생각해요. 전 세계 창작자들이 애도와 슬픔 속에 있어서 창작을 많이 못했겠지만 이 시기가 지나가면 더 서로를 만나고 싶어하겠구나, 그럴 수 있는 세계가 왔으면 좋겠다고. 너무 평범해서 자각하지 못했던 애정을 다시 한번 자각하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독자들의 질문


Q: 안녕하세요? 저희는 채드윅 국제학교 재학생입니다. 우선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여하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제가 여쭤보고 싶은 질문은 작가들은 종종 자신의 개인적 삶의 이야기를 활용합니다. <목소리를 드릴게요> 와 같은 경우, 책의 일관성, 사생활, 장르를 고려했을 때, 작가님의 삶의 요소를 얼마나 포함할지를 어떻게 결정합니까? 질문에 답을 꼭 듣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세랑: 예를 들어 파올로 조르다노 작가님이 마티아가 아닌 것처럼 제가 쓰는 인물들도 저를 닮았지만 제가 아니게 되는, 완전히 해체해서 조립하는 과정이 꼭 문학에 들어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점점 더 쓰면 쓸수록 자기 이야기가 들어가기 보다는, 작가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 전체의 이야기를 통과시키는 파이프 같은 게 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점점 더 자기 자신을 비우고 그 안으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지나가는데, 그것이 완전히 문학화 된 형태로 새롭게 만들어져서 지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Q: 정세랑 작가님 안녕하세요? 저는 서민정이라고 하고, 서강대학교에서 경영학과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목소리를 드릴게요>가 특히 매력적이었던 것은 이야기에 독특한 소재를 활용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흥미로운 건, 각 등장인물은 독특하고 비현실적인 초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현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인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 단편소설에 대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폭력과 잔인함이 정상화되고 상품화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요. 무의식적으로 16명의 살인범에게 잔인한 행동을 유발하는 교사를 사랑스럽게 그려내는 것과 관련한 윤리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풍자나 다른 사회적 발언인 겁니까?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저자의 역할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오락을 제공하는 것일까요? 꼭 알고 싶으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세랑: 아주 날카로운 질문 감사합니다. 제가 사실 이 작품에서 하고 싶었던 건 풍자였는데. 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든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 생각해요. 특히 코로나19를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운송노동자들 덕분이었는데, 사실은 택배나 혹은 배달 노동자 분들의 사망률이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힘든 이 시기를 지났지만, 그 와중에 죽은 사람들이 늘었다는 것을 잘 직접적으로는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게 현대사회의 특징이 아닌가 싶어요.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혹은 죽음이 너무 멀게 느껴져서 다 함께 얽혀있다는 것을 사실은 잘 보지 못하는 것이죠. 아까 조르다노 작가님께서 “우리가 우리 안의 악을 제대로 볼 수 있는가” 라고 하셨던 질문과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유발하는 죽음에 대한 풍자로 그렇게 들어간 이야기고, 그래서 작품을 쓸 때 아주 오락적인 소설 안에도 윤리가 있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어서, 윤리를 항상 오락으로 감싸고 있는 형태로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합니다. 


Q: 안녕하세요. 저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백지연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읽은 작가님의 작품은 <소수의 고독> 이었는데요. 두 주인공이 가족들에게 상처를 받고, 그 고독을 서로를 통해 이겨 내보려고 하는 과정과 그 결과를 담담하게 이야기 한 것이 참 아름답다고 느껴졌고, 학생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또 최근에 작가님께서 출간하신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를 읽고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요. 책 내용 중에서 ‘고립의 시간 동안 우리가 단지 인간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 섬세하고 숭고한 생태계에서 인간이야 말로 가장 침략적인 종’이라는 구절에 깊은 공감을 했습니다. 코로나를 겪고 있는 그리고 겪은 후의 사회에서 작가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작가님의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파올로 조르다노: 질문 감사합니다. 저는 작가들을 대표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의 입장만 말씀드릴 수 있겠는데요. 같은 상황을 두고도 작가마다 극단적으로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글쓰는 작가의 아름다움이기도 하지요. 무엇보다 자신의 렌즈로 본 세상에 대해 글을 씁니다. 앞서 ‘렌즈’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제 생각에 어떤 작가를 흥미롭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 작가가 무엇에 대해 쓰느냐가 아니라 현실을 보고 목소리를 내기 전에 현실을 보는 그 작가만의 렌즈입니다. 


From [2020 서울국제작가축제(SIWF)] 폐막강연 (Closing Keynote Spe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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