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국제 작가 축제 (SIWF) 폐막 강연
<시선으로부터>, <보건교사 안은영>, <목소리를 드릴게요> 등 소설을 쓰신 정세랑 작가님의 꼭꼭 소개하고 싶은 강연이 있어서 가져왔어요! 이어지는 대담은 여기. 캡처 화면 아래에 강연 전문 텍스트와 영상 링크가 있습니다 (캡처에는 빠진 부분도 약간 있어요).
망가진 세계에서, 우리는 - 정세랑
폐막 강연에 참여하게 되어 무척 영예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로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전 세계적인 애도와 다가올 날들에 대한 우려 속에서도, 이처럼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의미 있는 행위라고 여깁니다. 축제의 마지막, 부드럽게 떨어지는 커튼은 언제나 다음을 기다리게 만듭니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때는 세계가 이보다 나은 상황이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판데믹 이후, 유사한 내용으로 2018년에 발표했던 소설 <7교시>에 대해 어떻게 알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 격리된 사람들의 자유와 시민성에 대한 소설인 <목소리를 드릴게요> 역시 2020년의 방식으로 다시 읽혔고요. 저 말고도 비슷한 소설을 쓴 후 비슷한 질문을 받고 비슷한 경험을 한 작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동료 작가인 장강명 작가가 ‘작가들은 패턴을 보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지금의 판데믹은 가축 전염병의 패턴으로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격년으로 가금류를, 돼지를 수백만 마리에서 수천만 마리씩 살처분해왔습니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이 돌 때 전 세계 인구는 16억이었습니다. 현재 인구는 78억입니다. 인구 폭발이 일어났고, 폭발한 인구를 먹이기 위한 가축들은 매년 어마어마하게 키워지고 도살됩니다. 밀집 축산에서 발생하는 위험이 있고, 극도로 영역이 위축된 야생동물들이 가져올 위험이 있고, 그 위험들은 결국 서로 엉킬 겁니다.
코로나19 판데믹을 해결할 수 있다 해도 그다음의 위험은 또 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파올로 조르다노 작가님의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를 읽으며 지구 반대편에서 같은 결론에 이르셨구나, 가라앉은 마음으로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 기적적인 행성을 아무 존중 없이 대해왔다는 것이 최근에 일어난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가장 큰 원인일지 모르겠습니다.
기후 위기는 코로나19보다 더 심각한 파국을 가져올 것입니다. 저는 심한 기후 우울증을 앓고 있고 10년 후, 20년 후, 50년 후의 미래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에 작은 절벽이 생깁니다. 요즘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점점 강력해질 태풍입니다. 한국은 태풍 지역이고 올여름 연이은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중반에는 지금보다도 몇 배나 강해져, 철골을 휘게 할 대형 태풍들이 발생할 거라는 예측이 저를 잠 못 들게 합니다. 태풍 지역이 아니더라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례적인 홍수와 가뭄 역시 큰 피해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물 순환 구조가 깨지면 그다음은 식량난일 것입니다. 미래 세대가 재난 속에 굶주리게 되면 어떡하나, 어린 조카들을 보면 울컥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 곁에 야생동물들이 다 사라지고 없으면 어떡하나도 걱정합니다. 여섯 번째 대멸종은 이미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확한 수는 아무도 세지 못하지만 야생동물의 70퍼센트가 이미 사라졌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대로 알지 못했던 다양한 동식물종들이 소리 없이 멸종하고 있고, 그 자체로도 슬픈 일이지만 어쩌면 세계를 고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소중한 열쇠들도 영원히 발견되지 못한 채 함께 사라지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세계는 망가졌고, 아무도 망가진 세계에 대한 대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세계가 망가졌다는 소리를 전혀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위기를 외면하거나, 혹은 화를 내며 거부합니다. 19세기, 20세기 사람들이 잘못한 것에 우리가 왜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풍요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계속 성장하고 생산하고 마음껏 소비하면서, 과학자들에게 마법 같은 해결책을 만들어내라고 해라, 정부와 기업의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다, 나는 모르겠다. 귀를 막은 이들은 과학적인 데이터를 무시하고 더 나아가 위기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외면과 거부를 이해와 공감으로 이끄는 데 저는 문학의 소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때로 폭력적이고 근시안적인 선택을 했다 해도 인류는 기본적으로 공감과 연대, 이타성으로 지금까지 문명을 유지하고 융성해왔습니다. 파올로 조르다노 작가님이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를 쓰셨던 나날들, 그리고 그 인세를 의료 단체에 기부하셨던 것을 생각하면 저는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찾습니다.
공감과 이해, 연대와 이타성으로 빚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효율적인 것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대만큼 이야기가 절실히 필요할 때는 또 없을 거라 믿습니다. 특히 자본이 선택하지 않은, 조종하거나 걸러내지 않은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텍스트 기반의 이야기들을 다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쓸 수 있고 하룻밤 사이 링크 하나로도 퍼져나가니까요.
환경에 대한 소설을 쓰면 어떤 사람들은 불편하다고 말합니다. 문학에서 그런 것을 읽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교조적인, 프로파간다 문학이라고요. 그러나 세계가 절멸을 향하고 있을 때, 환경에 대해 쓰지 않는 쪽이 더한 기만일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더 많은 사람들은 변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왜곡된 부분을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짚은 다음 함께 생각해보자고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다른 삶을 택하곤 합니다. 그 가변성은 언제나 저를 계속 쓰게 하는 힘입니다.
파올로 조르다노 작가님은 수학적 시선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소설을 쓰시고, 저는 역사교육학이 녹아든 소설을 씁니다. 역사교육학이 바탕에 흐른다는 것은, 위기를 앞에 두고도 이기적인 동기로 실패했던 과거의 반복을 막기 위해 쓴다는 의미입니다. 소설은 폭주하는 자본주의와, 혐오와, 차별과, 전체주의와,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와, 반지성주의와, 인간 중심주의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야 합니다. 강대한 석유회사와 70kbyte의 문자로 싸워야 합니다.
환경에 대해 쓰다가 프로파간다 문학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도 대변해주지 않아 스러져가는 존재를 대변하려고 하는 노력엔, 독재를 대변하던 것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21세기의 작가들에겐 과거의 작가들이 빠졌던 함정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21세기의 독자들은 함께 호흡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스는 비폭력적 저항을 하는 인구의 3.5퍼센트로도 기존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는 연구를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책을 읽고 쓰는 사람들이 아마도 그 3.5퍼센트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확산력을 문학이 자극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미래를 향해 몸을 기울인 모난 이야기들이 사람들 안쪽의 스위치에 닿을 수 있다면요. 그 작은 확률에 많은 것을 걸고 살아갑니다.
지구 곳곳의, 더 다양한 바탕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만의 바탕을 가지고 문학을 쓰면 좋겠습니다. 어떤 문화권에서 태어났든, 어떤 계층에 속하든, 어떤 교육을 받았고 이전까지 무슨 일을 했든 작가가 되는 데는 아무 한계가 없으니까요. 노트북 하나, 혹은 연필 하나로도 충분합니다. 열일곱 살도 예순다섯 살도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인생으로 만든 패턴 인식기로, 이 세계의 어두운 곳과 밝은 곳을 바라본 후 서로가 파악한 상(像)을 겹칠 때 진실의 외곽선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 망가진 세계를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짚는 빛나는 화살표가 되고, 고쳐야 한다고 설득하는 돌림노래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인류가 문명의 끝에 닿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문명의 초입에 서 있습니다. 다가오는 절망보다 빨리, 전환을 이루어낸다면 문명은 더 나은 방식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전 세계의 작가들이 서로 연결되며 풍성한 생태계를 형성할 때, 문학은 사회의 근사히 기능하는 필터가 될 겁니다. 이 희귀한 방식으로 아름다운 행성을 파괴하려는, 우리 스스로를 자해하려는 폭력성을 끝내는 걸러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23세기 사람들이 21세기 사람들을 경멸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무너지지 않게 잡아매는 투명한 그물망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말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계속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