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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Feb 25. 2024

Carnaval, 그 카니발 맞아요

요란법석 카니발, 전체관람가 수준으로 즐기기

2월 중 가장 큰 행사는 단연 카니발. 스페인어로는 카나발(Carnaval)이라고 한다.

코스튬을 입고, 거리 행진을 하고, 많이 먹고, 많이 마신다. 약간은 난잡할 정도로 즐기는 게 포인트. 유명한 이탈리아 가면 축제도 바로 이 카니발이다. 코스튬을 입기엔 아무래도 2월은 좀 추운 날씨라 왜 이때 하나 했더니 역시나 종교적인 배경이 있었다. 부활절 전에는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먹고 마시는 걸(특히 육식) 자제하는 사순절이 이어지는데, 그 사순절 전에 카니발 기간이 있다. 그래서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직전인 전 주 목요일부터 화요일까지가 절정이라고. 이제 한동안 즐기지 못할 테니, 전에 진탕 놀아보자는 건가 보다.


스페인 내에서도 지역마다 행사의 규모가 다른 것 같은데,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그냥 얼렁뚱땅 지나갔던 걸 보면 우리 동네에서는 소박하게 보내는 편인 듯. 작년에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새로 알게 된 바로는 우리 동에선 학교에서 진행하는 행사와 시에서 주최하는 행사 두 가지가 전부인 것 같았다.


카니발이 다가오자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유치부와 초등부 공통으로 드레스 코드를 줬다. 화요일에는 운동선수처럼, 수요일에는 잠옷 차림으로, 목요일에는 원하는 대로 분장을 하고 등원을 했다. 그 때는 딸아이 옷을 입히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등원 길에 다른 아이들이 입은 옷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학교 주최 행사는 금요일이 하이라이트인데, 일단 오전에는 평소처럼 입고 갔다. 대신 점심을 먹고, 다시 모여 오후 행사를 한다. 단체로 미리 준비해 둔 코스튬을 입고 동네 한 바퀴 행진을 하고 학교로 돌아오면, 간식을 주는 행사가 계획되어 있었다. 간식으로는 '발렌시아나(valenciana)'라고 하는 달달한 머핀과 핫초코를 준다. 반 별, 혹은 학년 별로 주제를 가지고 의상을 미리 준비하는데, 올해 유치부의 의상은 호두까기 인형으로 정해졌고, 학년 별로 색을 다르게 정했다. 작년에는 서커스라는 테마 아래 2세 반 아이들은 마이머를 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대충 줄무늬 윗옷과 검은색 바지, 흰 장갑 등을 알아서 준비할 수가 있었는데, 올해는 학부모회에서 구입할 의상 자체를 정해버려서 조금 아쉬운 면이 있었다. 어쨌든 그걸 공수한다고 크리스마스 방학 전에 이미 반 별로 단체 주문을 해 뒀었고, (알리 익스프레스는 배송 기간이 길다.) 다행히 제 때  도착한 의상을 며칠 전에 입혀보니 모자가 좀 커서 속에 살짝 옷감을 덧대두었다.


금요일은 2시 하원 후 빨리 점심을 먹고, 코스튬을 입혀서 3시 5분까지 다시 유치원에 가야 했기 때문에 (엄마만) 마음이 바빴다. 점심은 바로 먹을 수 있게 준비해 두고, 밀대가 달린 세발자전거(급할 땐 유모차처럼 쓰인다.)를 끌고, 아이를 데리러 갔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어찌어찌 먹고, 의상을 겨우겨우 입혀서(그 와중에 춥지 말라고 속에 입는 옷을 이거 입겠네, 저거 입겠네... 어휴!) 유치원에 데려갔더니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있었다. 선생님, 친구들과 같은 의상을 입고, 포토월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제법 축제 분위기가 나니 딸아이는 팔짝팔짝 뛰고 신이 났다. 행진 시간이 되자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두 줄로 세워서 교문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유치원 근처 광장에서 초등학교 아이들과 모여서 함께 동네 한 바퀴를 하는 동선이었다. 광장에는 학부모는 물론이고 조부모, 친척들까지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구경을 나온 것 같았다. 나도 시어머님, 시고모님과 함께 아이들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으려 애를 썼다. 곧 초등학교 아이들이 북을 치며 줄을 맞추어 도착했다. 아이들은 요정이나 공주, 중국 사람, 등으로 분장을 하고는 아는 얼굴이 보일 때마다 의기양양하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유치부와 초등부가 하나로 합쳐져서 행진을 시작하니 자연스럽게 양 옆에서 아이들을 따라가는 부모와 가족들의 행렬이 생겼다. 우리도 무리에 끼어 시광장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작년에는 아이가 행사 당일 감기 기운이 있어서 카니발 행사를 놓쳤기 때문에, 카니발 행진은 우리에겐 처음이었다. 처음은 언제나 그렇듯이, 신선한 경험으로 다가왔고, 나름 소중한 순간이라 느껴졌다.


스페인으로 이사 와서 카니발을 처음 봤던 때가 생각났다.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당시에 어머님은 학교 구내식당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그때는 카니발 행진 후 학생과 학부모 모두에게 핫초코를 줬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거의 천명 분량을 혼자서 준비하셨단다. (어머님 은퇴 후에 간식은 학생들에게만 제공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걸 보면 어머님 공이 꽤 컸던 모양이다.) 물론 어머님은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기 때문에, 나에게도 행사를 구경하러 오라고 하셨다. 어머님이 오라고 하시니 내키지 않아도 구경을 가긴 갔는데 역시나. 초등학생들의 카니발 가장행렬은 그다지 큰 구경거리가 못 됐다. 어머님 동료분들이 반갑게 맞아주며 살갑게 건넨 발렌시아나와 핫초코 맛도 그저 그랬다. 내가 여기 왜 있나 어색하기만 해서 잠시 서성거리다가 얼른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 기억.


어느새 카니발 행렬이 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운동장에 앉아 고학년이 준비한 공연을 구경하는 유치부 아이들 중에 딸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아직 어린아이들에게 도보로 동네 한 바퀴는 조금 무리였던지, 행진하기 전에 까불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다들 얌전히 앉아 있었다. 공연이 끝나자 아이들은 간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메리엔다(merienda, 오후 간식)로 설탕이 잔뜩 들어간 빵을 핫초코에 찍어 먹으면서 다시금 기력을 되찾고 있을 때, 학부모들은 밖에서 삼삼오오 수다를 떨며 기다렸다. 핫초코는커녕 커피 한 잔도 손에 들고 있지 않았지만, 지금 내 모습이 내가 몇 년 전 이 자리에서 봤던 학부모들과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행사에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들 왜 그리 즐거워 보였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오늘 나는 들러리로 구경을 온 게 아니라, 내 잔치에 들어와 있는 거였다.




다음 날, 토요일 저녁에는 마을의 카니발 행사가 열렸다. 작년에 학교 행사는 못 갔어도 이 행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 기억이 있어서 올 해에도 가기로 했다. 작년에는 광장에서 저녁 간식을 먹고(역시  핫초코와 발렌시아나) cantajuego(아이들을 위한 춤과 노래 공연)를 본 후에, 동네 체육관 다목적 홀에서 각자 싸 온 보까디요(bocadillo, 바게트 샌드위치)로 저녁 식사를 했었다. 가족 단위로 참석한 사람들이 많아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틈에서 저녁을 먹고도 한참을 어울려 놀았었더랬다.  


저녁 행사를 위해 일부러 낮잠을 재웠다. 한숨 자고 일어난 아이는 오늘의 의상으로 엘사 드레스와 망토를 골랐다. 아직 영화도 안 봤는데 어찌 알았는지  하얀 장갑까지 야무지게 챙겼다. 행진 시작는 광장으로 가보니 코스튬을 입은 사람은 주로 아이들이었던 작년과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올해는 마을 청년들로 구성된 축제 준비 위원회에서 행사를 주관했다데, 그러다 보니 기금 마련을 위해 행사의 주 타깃을 젊은 층으로 잡은 것 같았다. cantajuego 공연은 없애고 대신에 가장행렬 코스를 더 길게 잡았다. 저녁 식사 후에 디스코 파티를 기획해서 그런지, 확실히 친구들과 함께 온 젊은 층이 많았다. 그룹별로 의상을 맞춰 입은 이들이 많아서 가장행렬 자체는 작년보다 더 볼거리가 많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아이가 선뜻 행렬에 끼지 않으려고 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어제 학교 친구들과 했던 행진의 분위기를 상상했었던지, 어른들이 좀 더 그럴싸하게 분장한 모습을 보고는 좀 놀란 모양이었다. 게다가 한 그룹에서 분장 소품으로 향을 피워 연기가 뿌옇게 차오르고, 다른 팀은 북을 둥둥 울려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는데, 그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된 듯했다. 결국, 우리는 행렬의 끄트머리에서도 저만치 떨어져서 저녁 식사 장소로 이동을 했다. 작년처럼 가족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저녁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함께 온 친구네 가족과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저녁치고는 이른 시간이라 아직은 아이 동반의 가족 참가자들이 많았다. 저녁을 먹고 나니 슬슬 젊은 친구들이 몰려오면서 점점 파티 분위기가 나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예상했던 시간보다 조금 일찍 아이들을 데리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행사는 작년보다 못해서 조금 아쉽긴 했지만, 아이가 친구와 한참을 뛰어놀더니만 금방 잠이 들었으니 그냥저냥 만족이었다.


며칠 뒤, SNS에서 남편의 사촌이 올린 그날의 사진과 동영상을 봤다. 춤을 추며 거리를 행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자신도 그 안에서 함께 춤을 추면서 찍은 것이었다. 그냥 지나가는 행렬을 구경하면서 찍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흥겨운 분위기가 묻어났다.


역시 축제는 밖에서 보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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