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인 새해는 포도 열두 알을 먹으면서 시작하지만, 나의진짜 새해는 아이의 유치원 방학이 끝나서야 시작된다. 크리스마스 방학은 12월 22일 즈음에 시작해서 1월 6일 주현절, 동방박사 오신 날(Día de los Reyes Magos)이 지나야 끝이 나는데, 이 기간 중에 새해 첫날이 슬쩍 끼어있기 때문. 크리스마스부터 주현절까지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도 많고, 이런저런 행사를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고 바빠서, (게다가 산타 할아버지와 세 분의 동방박사는 아이들 선물 준비하느라 바쁘다.) 아무래도 연휴가 좀 끝나야 한숨을 돌리게 되니 새해 기분도 그때에서야 찾아오게 된다.
가족이 함께 연말연시 행사들을 찾아다니며 추억을 쌓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옆 동네, 윗동네, 아래 동네, 저 아래 좀 큰 동네까지 거의 매일을 밖으로 나돌다 보면 솔직히, 애들은 학교에 가고 어른들은 일을 하는 평일의 날들이 그리워진다. 주현절이 지나고 드디어 등원인가 했는데, 아이가 아파서 일주일 동안 결석을 했다. 연말연시의 피로가 몰렸는지 우리 부부도 컨디션이 안 좋았고, 일주일을 꽉 채워서 그냥 다 같이 아팠다. 다들 좀 낫고 이제 새해 기분이 좀 나나하고 봤더니 벌써 1월 중순이 되어 있었다.
아이가 등원한 그 주에 바로 Hoguera(모닥불) 행사 안내문이 날아왔다. 안 그래도 유치원 마당에서 모닥불을 피우는 행사를 하니, 오전 간식 도시락은 싸 오지 말고 대신 장작으로 쓸 나뭇가지를 가져오라던 게 이맘때쯤 아니었나 하던 차였다. 행사 당일 등원 길에 힐끗 보니, 마당에는 이미 모닥불이 타고 있었다. 이 날 오전은 자기가 가져온 작은 나뭇가지를 불 속에 던져 넣고 노래도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그 불에서 익힌 스페인식 소시지 (longaniza)를 바게트 빵에 넣어 만든 보까디요(bocadillo)를 다 같이 먹을 거였다. 하원 길에 행사가 어땠는지 물어봤더니, 바람이 많이 불어서 모닥불 아래에 깔아놨던 모래가 눈으로 조금 들어갔었는데 그래도 재미있었단다. 보까디요는 잘 먹었냐고 물어봤다. 깔깔거리다가 갑자기 생각났는지 정색을 하고는 갈릭 마요네즈를 넣어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무 소스도 안 넣어줬다며 못내 아쉬워하는 게 너무 웃겼다.
학교나 유치원에서만 모닥불을 피우는 게 아니라, 그 주 토요일에는 온 동네가 모닥불을 피우고 바베큐를 한다. 시청에서는 미리 신청한 그룹에게 모래와 장작을 지원하고, 길 가에서 불을 피우고 바베큐를 할 수 있게 허가를 내준다. 작년에는 아이가 어려서 참여할 엄두를 못 냈었는데, 올 해에는 이웃들과 함께 바베큐를 해보기로 했다. 자기가 한 요리를 사람들과 나눠 먹는 걸 좋아하는 남편이 그룹 대표로 신청을 했다. 당연히 불 피우고 고기 굽는 것도 도맡았다. 친구들과 이웃들을 초대해서 그날 저녁은 다 같이 바베큐를 먹었다. 집 앞 길가에 테이블 하나 펼쳐놓고, 그냥 길가에서 한 데 어울려 시간을 보냈다. 사람 수대로 맞추진 못했지만 십시일반으로 의자도 꽤나 여럿 준비했었는데 아이들만 먹을 때 잠시 앉았을 뿐, 대부분이 서서 시간을 보냈다. 어른들은 먹고 마시면서도 서성서성 돌아다니며 수다를 떨었고, 아이들은 뛰어다니거나 킥보드, 자전거를 타고 노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한자리에 앉아 불멍을 때리고 싶은 건 나뿐인 것 같았다. 현실적으로 아직은 아이를 따라다녀야 하니 제대로 불멍할 처지는 못 되었다. 아쉬운 대로 아이를 따라다니면서도 틈만 나면 모닥불 곁으로 갔다. 차가운 밤공기도 상쾌했고, 불 가까이에 가면 훅 다가오는 따뜻한 열기는 더 좋았다. 그전 주에는 춘삼월 같더니, 야외에서 행사를 하려니까 갑자기 추워져서 그랬나 보다.
모닥불을 피우는 행사는 안토니오 성인의 축일(San Antón)을 축하하는 여러 가지 행사 중 하나다. 안토니오 성인은 동물의 수호성인이라 가축이 중요한 재산이던 옛날에는 꽤나 중요했고, 1월 중에는 이 San Antón 관련한 여러 가지 행사가 몇 주나 걸쳐 이어진다. 모닥불 행사 외에도, 구시가 좁은 길에 소를 풀어놓고 달리게 하는 행사(팜플로나의 소몰이처럼 하는 바로 그 행사다.)가 작은 규모로 열리고, 동물들에게 성수(聖水)를 뿌려주는 행사도 있다. 내가 보기엔 두 번째 행사가 동물의 수호성인을 기념하는 데는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동물들이 건강하게 한 해를 보내도록 축복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 날은 마을 사람들이 너도나도 반려동물을 데리고 나와서 여러 동물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아이와 함께 가볍게 구경을 가기에 좋은 행사라 작년에 이어 올 해에도 다녀왔다.
빠에야(Paella) 대회도 한다. 한 달 전쯤부터 미리 신청을 받는데, 팀을 만들어서 신청하면 마찬가지로 모닥불 장작을 지원해 준다. 공터에 다 같이 모여서 팀마다 하나씩 빠에야를 만들고, 완성된 빠에야는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매겨서 1등을 뽑는다고 한다. 작년에는 아이가 행사장을 지나다 빠에야 냄새를 맡고, 먹고 싶다며 막 울어서 남편이 급히 작은 빠에야를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빠에야는 만드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 올 해는 행사 자체를 보지는 못했지만, 행사 후에 모닥불 재가 여기저기 남아있는 것을 보고 관심을 보였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는 내년엔 우리도 빠에야 대회에 나가잔다. 그러지 뭐. 네 아빠한테 얘기하면 당장 그러자고 할걸?
스페인에서 몇 년을 지내고 나니 이제 우리 동네에서는 매 월 어떤 행사가 열리는지 대충 감이 잡힌다. 그리고 언제쯤엔 어디에서(그리 멀지 않은 동네들) 어떤 행사를 보고 온다는 우리 가족 나름의 연례행사 일정도 생겼다. 매년 반복되는 일의 좋은 점은 지난 기억을 곱게 잘 붙잡아준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특별한 일이 있었던 '작년 이맘때'나 '재작년의 오늘'은 더 잘 기억이 나니까. 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더 그렇다. 매번 '벌써 이 축제를 할 때가 됐나?' 하며 시간의 속도도 실감하게 된다. 같은 행사에서 찍은 작년 사진과 올해 사진을 비교해 보면 아이가 쑥 큰 것도 한눈에 보인다. 이제 매년 같은 행사에서 찍은 사진이 쌓여가면서 아이의 추억도 차곡차곡 쌓이고 점점 선명해지겠구나 싶다.
매년 반복했던 연례행사들은 유년의 기억 대부분을 형성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면서부터 시기마다 찾아오는 이곳의 축제나 행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명절도 챙기려고 노력하게 됐다. 축제의 즐거운 기억이 해마다 쌓여서 아이의 어린 시절이 행복한 느낌으로 남길 바래서다. 게다가 아이가 크면서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갈 수 있는 곳도 점점 더 많아진다. 일단, 올 해는 모닥불이 하나 추가됐고, 내년부턴 빠에야 대회가 하나 더 추가될 듯싶다. 올 해도 이렇게 시골 마을의 축제를 살아가면서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들어야지. 그러다 보면 우리 모두의 한 해가 풍성하게 채워져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