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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Feb 14. 2024

포도 열두 알로 시작한 새해

매년 맞이하는 새해지만 매년 설렌다

2023년의 마지막 밤 nochevieja.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공중파 TV를 틀고 채널을 돌리면서 어떤 방송과 함께, 새해를 맞이할지 고르고 있었다. 포도 열두 알을 담은 유리잔도 미리 준비해 뒀다. 작년에는 새해가 되는 순간까지 깨어있어서 장난감 기타를 치며 축하공연을 해주었던 아이는 벌써 잠이 들어서, 오래간만에 둘이서 조용한 시간이었다. 어차피 아이는 오늘 낮 12시에 신년 종을 치는 행사(campanadas)에서 포도도 먹고 새해 기분을 내고 왔으니 아쉽지는 않을 것이고. 작년에는 몰랐는데, 아이들의 위해 낮 12시에 이런 행사를 하는 게 제법 세심한 배려라고 느껴졌다.


남편은 각 채널마다 어떤 가수를 초대해서 공연을 하는지를 눈여겨보면서 제일 잘 나가는 출연진이 포진한 채널을 고르려고 분주했다. 어차피 제야의 종이 칠 때는 Christina Pedroche가 나오는 채널로 옮길 것이었다. 모델이자 방송인인 그녀는 2015년 제야의 종이 칠 때 겉 옷을 벗어던져, 속에 입고 있던 전위적인 드레스(거의 헐벗은 차림새)를 선보이며 세간의 눈길을 끈 이후, 그 전통(?)을 계속 이어오면서 유명세를 더하고 있다. 새해를 약 십 오분쯤 앞두고 있기에 그녀는 아직 초록색 나뭇잎과 덩굴줄기를 두른 하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나는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건성으로 들으면서, 휴대폰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진을(잘 나오지 않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골라서) 지우고 있었다. 연말연시라 사진 찍을 일이 많은데, 휴대폰 용량이 거의 차서 불편하던 차였기에 어서 조금이라도 공간을 확보해야 했다. 어차피 하드 디스크에 다 저장해 두었지만, 일정 기간의 사진을 통째로 지우는 게 어쩐지 마음이 안 내켜서, 굳이 시간을 들여 하나씩 하나씩 삭제한다. 남편은 절대 이해 못 하는 나의 이 작은 의식은 보통 매월 말에 거행되는데, 사진을 샥샥 넘기며 쉭쉭 지우다 보면 어쨌든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되는 장점도 있다.(고 나는 우긴다.)


사실, 사진 정리를 하지 않더라도 스마트폰이 지난 추억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1년 전의 오늘', '3년 전의 오늘', '5년 전의 오늘'이라면서 특별히 사진을 많이 찍은 날이 있으면 짧은 슬라이드쇼로 동영상을 만들어주고, 더 친절하게 여러 해를 함께 보여줄 때도 있다. 남편의 스마트폰이 지난 몇 년의 nochevieja 때 사진들을 모아준 덕에 그 시간들이 생각났다. 작년부터는 우리 가족끼리 조용히 새해를 맞았지만, 그전에는 여러 해 동안 친구네 커플과 함께 더블 데이트 하듯이 보냈다. 재작년만 해도 이미 두 집에 아이가 하나씩 있었으나, 아직은 좀 어린아이들이라 돌보기가 좀 더 수월했던 모양이다. casa rural(시골 민박집)을 하나 빌려서 함께 포도를 먹고, 파티용으로 만들어진 종이 고깔모자며 안경을 쓰고, 둘둘 말린 종이 리본도 던지면서 새해를 맞이했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우리 시골 동네의 작은 시청 광장에 나가 불꽃놀이를 보기도 했었고, 어떤 해에는 가까운 도시에 방을 잡아놓고 시청 광장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시청 광장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는 건 아무래도 아이가 조금은 더 커야 가능할 테니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이렇게 TV로 Campanadas를 보겠지. 아이가 더 커서 아예 친구들과 어울리려 하는 날도 올 텐데, 지금처럼 가속도가 붙어 시간이 휙휙 지나간다면 금방 그 순간이 올지도 모른단 생각에  마음이 이상해진다.


스페인에서 새해를 맞는 것도 벌써 다섯 번인가, 여섯 번인가. 이사 오고 나서 첫 해에는 새해맞이 소감을 어딘가에 적어둔 것도 같은데, 그게 일기장이었던가, 블로그였던가. 일상에 대한 소소한 글이라도 썼던 기억이 언제인지 가물가물했다. 몇 년 사이에 글쓰기를 서서히 손에서 놓아버리고, 사진을 찍는 것으로만 그 자리를 메꿔온 게 아닌가 싶었다. 그나마 하루에 서너 줄 육아 일기라도 썼다는 게 장할 지경이었다.


가만, 전에도 이런 적이 있지 않았던가? 나는 잠시 멈칫했다. 영국에 워킹홀리데이를 갔을 때 영어의 바다에 푹 빠져보겠다며 글도 영어로 끼적끼적거렸던 게 떠올랐다. 내 마음을 담아내기엔 나의 영어 그릇이 너무나 작았던 탓에 당연히 쓰기 자체를 주저하게 됐고, 결국엔 영어든 한국어든 그 기간에 남긴 기록의 양 자체가 아주 보잘것없게 됐다. 그때는 서른 넘어서 뒤늦게 막차를 탔다고 생각해서 나름 절실한 마음에 그랬었지만, 나중에 와서 후회를 많이 했었다. 실시간으로 기록하지 않은 탓에 잊혀지고 말았을 내 감정, 느낌, 생각들... 그 소소한 기억들을 내가 얼마나 아쉬워했는데! 그런데, 그 짓을 또 했다니!! 게다가 이제는 아이를 위해서라도(아이에겐 내가 거의 유일한 한국어 사용 모델이다.) 모국어 사용 수준을 높여야 한다면서, 정작 읽고 쓰기를 멀리했다니!!!


이리 돌고 저리 돌아 다다른 생각의 끝에서 내가 어질어질해하는 사이, 자정이 가까워졌다. Christina Pedroche가 나무 덩굴이 주렁주렁 붙어있는 하얀 엘프 코트를 벗었다. 물을 아껴 쓰자는 주제 의식 아래, 디자이너가 한 땀 한 땀 제작했다는 바이오 소재의 드레스는 아슬아슬 투명하기도 했다. 면적도 얼마 되지 않으니 분해되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곧이어 새해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종소리에 맞추어 포도를 한 알씩 입에 넣고 열심히 씹었다. 생각보다 종소리가 빨리 이어지기 때문에, 그 속도를 따라가려면 입 안에 있는 포도는 부지런히 씹어 삼키면서, 다음 포도를 입에 밀어 넣어야 한다. 내 딴에는 재빨리 움직인다고 했어도 어느새 햄스터처럼 양 볼이 가득 찼다. 남편처럼 마지막 종소리가 울렸을 때 열두 번째 포도알을 깔끔하게 삼키려면, 아무래도 내게는 몇 년의 내공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포도알을 우적우적 씹으면서 새해의 소망을 떠올렸고, 가족 모두의 건강을 기원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새해 인사를 했다.

"Feliz año nuevo."


역시 새해는 새해였다. 폭죽까지 터트리며 이제 막 시작한 시간은 마음을 들썩거리게 하는 어떤 힘이 있었다. 좀 더 잘 살아보자는 의지가 솔솔 피어났다. 어떤 글이든 쓰기를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한 기록의 대부분을 사진과 동영상이 차지하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가늘더라도 끊어지지 않게 쓰는 거야. 쓰다 보면 그동안 잊어버렸던 것들이 다시 돌아오고, 미뤄뒀던 일들을 드디어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매년 맞이하는 새해인데도 또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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